완도신문을 돋보이게 하는 텍스트를 꼽으라 한다면, 각 필진들의 글을 비롯해 감성적인 이들에게 잘 읽히는 신복남 기자의 야생화 이야기, 새로운 완도의 이야기를 전하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의 글이 좋아 보이는데, 원픽(하나만 고른다면)은 유영인 원장의 글 같다.권력자를 향한 쓰디 쓴 글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물의 본질과 핵심, 객관적인 면을 본 후, 언론적 정의를 발휘하면 되니까. 어려운 것은 현장을 누비는 것. 한 가지 주제의식을 갖고 십 년 이상 깊이 있게 연구하며 현장을 누비는 전문기자. 그런 이들이 데스크보다도 언론계의 전설
스스로 그리움에 젖는다. 옆에 있어도 그립게 보고 싶다. 많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 사무치게 그립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른 데에는 그리움을 많이 채우라는 뜻도 있을 거다. 이제 오후 가을 햇살이 닿는 곳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10월에 햇살은 은유의 색깔이 있다. 그리움으로 칠해진 수채화가 날이 갈수록 다르다. 10월의 꽃 중에 제1막은 쑥부쟁이, 취나물 꽃, 산국화, 강활, 억새꽃이다. 이렇게 한데 모여 피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생명이 짧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서 피는지도 모른다. 꽃이 질 때보다 활짝 필 때가 더 서럽게
‘진한국마한사’. 지금 듣기에도 생소한 한국고대사인 마한의 역사를 심도 있게 연구한 소남 김영현 선생은 불목리의 ‘넌지’라는 산막에서 반평생 제자를 가르치고 집필에 몰두했다. 1961년 그의 나이 81세, 그런데도 그의 연구열은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노익장의 기개를 펼쳤다. 그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한국고대사를 하루빨리 출판해야함을 제자에게 알리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박한 심정으로 애제자에게 논어를 비롯해 ‘진한국마한사’를 익히게 했다.책을 출간하기 위한 작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모든 자료는 한자
완도에는 인물이 많다. 응송 박영희와 소남 김영현은 완도가 배출한 인물 중 교육자요, 독립운동가로서의 그 행적이 뚜렷하다. 두 인물의 특징은 완도향교의 유림이던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국과 완도군을 위해 헌신한 것.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를 올리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완도향교는 완도 설군 이듬해인 1897년 향토 유사 침천 김광선이 건립을 추진하여 어렵게 지어졌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형식을 따르고, 3층 계단식으로 맨 아래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의 기숙사인
아직 일흔두살 나이가 믿기지 않은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백행덕 해녀를 만났다.″아니 뒷모습만 보면 지금도 총각들이 따라 가것어요, 아가씨때는 소안도 총각들이 여러 명 죽었을 것 같은디요.?″ ″오매! 참말로 그란가?.″ 소안면 진산리가 고향인 백 해녀는 1남 4녀 중 첫째딸로 태어났다. 완도읍 해녀 6인방 중 가장 키가 크고 항상 미소를 머금고 사는 멋스러운 해녀이다. 백 해녀는 다소 나이가 늦은 스물 두 살에 제주해녀를 통해 물질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내가 애릴 때부터 우리집 아랫방에 제주에서 원정물질 온 해녀들이 살고 있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살아 생전, 천억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천억원이란 돈은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던 김영한에게서 받게 된 것이었는데, 김영한이 누군가 하면. 시인들이 가장 사랑한 시인 백석을 한 남자로, 그녀는 북에 있는 정인을 한평생 그리워했다. 영한은 싯가 천억원에 해당하는 대원각을 무소유의 가치를 실현하던 법정스님에게 "받아라"했고 법정스님은 "못 받는다". 이런 실갱이를 십년동안이나 하다가 결국 법정스님이 받아 송광사의 재산으로 등록한 후 길상사로 변모됐다.대원각을 넘기고 얼마 후, 기자가 영한에게 묻기를 "천억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가 행복함을 느낀다. 간단한 사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야말로 얼마나 소중한가를 명약해진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항상 기댈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서 아주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다. 운명은 시간이란 좌표에 놓여있다. 시냇가에 작은 돌멩이도 시간의 흐름으로 밋밋하게 다듬어진다. 우리는 얼마나 살아봐야 시간의 흔적을 알 수 있을까. 시간의 예술은 음악이다. 시간의 간격이 섬세한 음률을 만든다. 이 속에 눈물이 있으므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음이 모여 하나의 곡이 되듯이
평일도를 눈으로 스캔하며 차를 타고 돌아본다. 금일도를 간다며 나섰던 것인데, 섬에 와서보니 이곳은 금일도가 아니다. 약산 당목항에서 뱃길로 20여 분 지나 당도한 섬은 금일읍, 금일도가 아닌 평일도다.익히 들었던 소랑막걸리 맛이 몹시도 궁금했던 터라 명사십리해변을 지나고서부터 유독 소랑대교에 눈길이 갔다. 소랑대교는 아침 해를 바다가 품고 있는 것을 형상화해 디자인됐다. ‘물결이 잔잔하다’는 의미를 붙인 소랑도의 다른 뜻은 소라의 이 지역 방언이라고. 바다를 보고 있으니 ‘소랑소랑’ 물결이 잔잔하다. 소랑도 이름에 딱 어울리는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참 잔인한 말이라고. 어리더라도 아프지 않아도 되고, 중년도 아플 수 있는데 이 한 문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뭉개버린다며 말이다. 맞는 말이다. 아프지 않아도 되는데, 아파도 되는데 왜 ‘청춘’이라는 말로 모두를 괴롭히는지. 어렸을 때는 빨리 나이 들고 싶었다.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누리고 싶었고, 학생이 해야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성인이 되니 다시 어려지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책임감을 버리고 싶었고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되찾고 싶었
『마음버스』(김유 지은이, 소복이 그림, 천개의 바람)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어느 날, 곰 아저씨가 운전하는 마을버스에서 ‘ㄹ’이 사라집니다. 곰아저씨는 사라진 ‘ㄹ’대신 네모난 나무 창틀을 ‘ㄹ’자리에 붙입니다. 이제 마을버스는 ‘마음버스’가 되었지요. 분주한 아침,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 말없이 창밖만 바라봅니다. 곰아저씨는 나무 창틀이 떨어질까 봐 버스를 살살 운전하고, 사람들은 마을버스가 마음버스로 바뀐 사연을 전해 듣습니다. 왜 이렇게 느리냐며 빨리 가 달라 외치던 사람들은 사연을 듣고는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하지. 사람들
지난호, 뉴스 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에 소개된 완도호랑나무가로수길을 기획한 군청 산림휴양과의 서현선 님의 한 남자, 박준영 님.18일 점심시간이 끝나갈 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겸손하지만 나약함이 없는 음성. 그래서 좌충우돌(폭팔적인 에너지란 그 감정선에서 나오는 것이라 처음엔 모호함 때문에 최후의 확신으로 가기 위해선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의 현선 님이 많이 의지할 것 같았다. 보도 후, 아내가 술상 차려 놔!에 군말없이 술상을 차려낸 박준영 님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아니, 완도
″누님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물에 갔다와 갔고 눴써 있는디 밥 생각이 없당께.......″″그러지 말고 따뜻한 국물을 드시게 밖으로 나오세요″″아따매 비도오고 그랑께 집앞에서 만나잔께″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무렵 긍정의 아이콘 홍정옥 해녀를 만났다.뜰이 넓고 식량이 풍부해 근심걱정 없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는 대정읍 무릉리.바닷가 마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산간 마을도 아닌 온 사방이 밭으로 둘러쌓인 무릉리가 고향인 홍정옥 해녀는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고 한다.″밑으로 남동생이 닛, 여동생이 서이
1905년: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맞서 싸움1910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조직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1921년: 독립군 총사령관 임명1927년: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임명193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임명 1943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타계 항일독립전쟁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일제강점기 독립군 최대의 전투였던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장군은 연해주 이주 100년만인 지난 2018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최근 윤석
고향은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다. 우리가 낳고 자라는 곳을 다시 찾고 싶은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고향은 맑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논 한 마지기에 나락이 몇 섬이 나오는지 관심이 없었다. 단 그것이 삶의 밑천이 되는 줄만 알았지만 세어보지는 않았다. 아무 욕심 없이 친구들과 놀기에 바빴다. 친구들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푸른 하늘을 보았던 그때가 가장 깨끗하였다. 미래에 대한 이상만 꿈꿨기에 현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지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그리움의 향수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한복을 입고 있었을 때, 한 5~6미터 쯤 떨어져서 바라 본 그 자태가 어떠했냐면. 초승달 같은 눈썹에 고아하게 뿌리는 첫봄비를 닮은 속눈썹하며, 선량한 눈빛과 우수가 깃든 눈망울은 만인뿐만 아니라 만물을 포섭한다. 연분홍빛 감도는 작은 입술은 어느 봄밤 매화꽃 피어나듯 고아하고, 목선에서 멈춘 머리결은 연못 가득 향기로운 연향 같았다.그때가 어느 다례제의 행사장 같았는데, 한복을 입은모습에 이런 은유를 해줬었던 같다. 5~6년 전의 일.사람이 안부를 전하지 않고 안보면 그렇게 잊게 되는 것이라서. 다만 그때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
흰 빨래가 가을하늘을 날리고 있다. 때가 빠지고 무게가 가벼우면 마음도 뽀송하다. 낮달은 저녁별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깨끗한 가을 하늘을 만든다. 멀리 있을수록 눈을 감고 기도하게 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시간이 가장 깨끗한 길을 만든다. 몇백 광년 지나야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전달될 수 있는 거리다. 그 여정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아마 생각하는 것들이 멈춰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안으로 묵혀두기로 하는 것들이 쌓일수록 가만히 눈을 감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 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맑고 깨끗한 곳일수록 멀리서 바
일본에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는 신(神)이 된 지 오래였다. 9세기쯤부터 전국 곳곳의 절과 신사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으로 숭앙받고 있다. 당시 일본은 항해술이 미비해 중국행은 '죽음으로 가는 행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컬럼리스트 주> 오는 2028년은 해상왕 장보고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지 12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 우리는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후예로서 진취적 기상을 드높이고 박애주의 펼쳤던 대사의 숭
지난해 전남도 어가소득 조사 결과, 연 소득 1억 원 이상 고소득이 2천501어가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1인 가구 증가 추세에 따라 가정간편식 개발 등 소비유형 맞춤 전략과 판로 차별화와 양식시설을 규모화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업종별로 전복 굴 꼬막 등 패류 양식이 721어가로 가장 많았고, 김 미역 등 해조류 양식 622어가, 굴비 등 가공 유통 483어가, 넙치 우럭 등 어류양식 293어가, 어선어업 237어가 순이었다.기후변화로 어획량 감소에 따른 어선어업의 고소득 어가 수는 다소 줄었으나 양식시설 현대화로
과거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적 사실들이 모르게 지나가는 것들도 많다. 현재의 순간에서 새롭게 알게 되면 과거도 변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야생화도 물가에서 새롭게 역사를 쓰고 있다. 노란 땅귀개와 보라색 이삭귀이개는 습지를 좋아한다. 이곳에 있어야 하나의 생명으로서 탄생할 수 있다. 귀이개는 아주 작은 수저 모양이다. 우리의 선대들은 생활에서 쓰이는 이름을 본 떠 이름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친숙하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이름도 있다.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밥풀은 각각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놀라운 일이 아니라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줄로 꿰어지듯이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것 같아요" 우리에겐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이란 노래로 친숙한 1908년에 쓰인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이다.국립난대수목원 유치 확정에 이어 그 어렵다던 예타통과까지 마무리해낸 박은재 산림휴양과장.민선 7기와 8기 현재까지 최대 성과를 낸 부서장이기도 한데, 사실 혼자 잘나 그렇게 일을 잘하는가 싶었다. 또 조조의 품에 있던 관우, 김형인 팀장을 데려오기 위해 사방팔방 힘을 쓰는 모습을 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