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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 했제. 3일 동안 결혼식신랑이 그때 울어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홍정옥 해녀(74)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9.2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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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
″물에 갔다와 갔고 눴써 있는디 밥 생각이 없당께.......″
″그러지 말고 따뜻한 국물을 드시게 밖으로 나오세요″
″아따매 비도오고 그랑께 집앞에서 만나잔께″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무렵 긍정의 아이콘 홍정옥 해녀를 만났다.
뜰이 넓고 식량이 풍부해 근심걱정 없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는 대정읍 무릉리.
바닷가 마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산간 마을도 아닌 온 사방이 밭으로 둘러쌓인 무릉리가 고향인 홍정옥 해녀는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밑으로 남동생이 닛, 여동생이 서이여″ ″내가 아가씨 때 어찌게 산지 알것제?″
″내가 클 때 우리 마을은 물질보다는 밭농사를 짓는 곳이여, 주로 보리하고 감제(제주나 남부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감제라 하고 감자는 북감자 또는 하식감자라 부른다)를 심어서 먹고 살었어.″
″우리 마을이 겁나게 큰디 마을에 감제공장이 있었어, 고구마를 갈아서 전분을 생산 해, 완도에 오기 전에는 거기서 일했어″     
물질을 어떻게 하게 됐냐는 물음에 홍 해녀는 어떻게 배운지도 모르게 물질을 하게 됐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보통 열 여덟살이 되먼 원정물질을 댕게, 그란디 우리 마을은 농사를 진게 나는 헤엄은 칠 줄 알아도 물질 기술은 없었어"
"또 동생들이 많은 께 엄마대신 동생들을 돌보고, 더군다나 전분공장에 댕김서 물질은 생각도 못했는디 스물한살 때 겁도 없이 친구 따라서 신지 가인리로 물질을 왔어" 
"네 명이서 함께 살며 나는 갓 물질만 하는데 그때 신랑을 만났어, 그때 내가 아담하니 한 인물 했거든 신랑이 징하게 쫒아댕게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어″
홍 해녀는 어떻게 1년을 버티고 물질이 끝나자 제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신지로 물질을 왔다고 한다. 
그러나 갓 물질만 하던 1년 전의 홍정옥이 아닌 새로이 해녀로 태어난 홍정옥으로 온 것이다. ″가인리서 1년 동안 물질이 늘었지만 제주에 돌아가자 상군들에게 물질을 어떻게 해야 잘 하는가 물어보고 바다에서 연습을 했어. 그래서 당당하게 해녀가 됐제.″
홍 해녀 역시 동생들이 많다 보니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애기가 애기를 본다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들을 돌봤는디, 부모님은 일하로 나가고 집에는 나하고 동생들만 있어, 아침에 엄마가 일 나가기 전 동생들을 잘 보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죽으나 사나 하루 종일 동생들을 보살폈어.″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학교를 가야하는데 농번기가 되면 학교 가는 일은 동생 돌보는 일에 밀려 학교를 가지 못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스물 한 살에 만난 네 살 연상의 아저씨와는 3년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스물 세 살때 결혼 날을 받고 신랑이 인사 차 제주로 왔는디, 그란디 그때만 해도 교통이 지금 같지 않고 겁나 불편해, 해필이먼 한달 동안 배가 안떠서 결혼식을 친정에서 제주도식으로  신랑 혼자서 했어"
"양복, 구두를 친정에서 다 해줬어. 제주도는 3일 동안 잔치를 한디 신랑이 그때 우는 모습을 첨 봤당게, 으째 울었는가는 모른디 물어보지 안 했구만.″
결혼 후 홍 해녀는 곧 바로 애들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딸 셋에 아들이 한난디.  첫째가 딸 쌍둥이여 임신을 한 줄은 알었는디 그때는 산부인과도 없고 임신했다고 병원에 간다하먼 놈들이 숭(흉)볼 때여 그란디 애기를 난께 쌍둥이여, 동내 할머니들 이야기 듣고 키웠어.″
시어머니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애들은 동내 할머니들과 제주에서 여동생이 와서 많이 키워줬다고 한다.
″그때는 정으로 많이 사는 세상 이었잔애, 물질을 감서 애기를 좀 봐주라고 하먼 다 봐줬어, 수고비는 따로 드리지 않고 여러 가지 선물을 사 드렸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비료를 많이 사 드렸어, 또 제주에 있는 여동생들은 물질을 배우지 않아서 시간이 나면 언니집에 와서 조카들을 봐 줬어.″             
긍정의 힘을 갖고 있는 홍 해녀에게도 아픔이 있으니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다.
″우리 아저씨가 낚시배를 오래 했는디 아들이 바다에 따라 갔다가 사고로 아들을 먼저 보냈어, 그것이 질(제일) 가슴 아프구만.″
홍해녀는 난바르는 다니지 않았지만 득량만에서 키조개는 오래 캤다고 한다. 
″장흥에서 키조개를 여러 해 캤는디 나는 나눠먹기를 했어요. 잠수 장비를 차고 키조개를 캐면 개당 얼마씩 해서 돈을 분배하는데 큰 돈은 못 벌었어도 수입은 좋았어, 바다속에 들어가면 키조개가 뻘에 쫙 박혀 있거든 그러면 그물망에 담기만 하면 되는데 장비도 무겁고 장시간 해야되서 힘든 작업이여.″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나 최근 들어 허리가 많이 아프다는 홍 해녀는 최소한 80까지는 물질을 할 계획이란다. 
″고무옷을 입고 물에 들어가먼 허리 아픈줄을 모른당께, 그래서 아픈 것을 잊어불고 물질을 하고 또 밖으로 나오먼 아프고......그래서 육지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해 걍 편안하게 쉬고 물 때 맞춰서 용돈 벌어서 쓰고.″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하늘엔 또 다시 비를 뿌릴 듯 먹구름이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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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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