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친구들 일렬로 짝지에 큰 大자 누워 몸 말려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백행덕 해녀(7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9.27 10:07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직 일흔두살 나이가 믿기지 않은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백행덕 해녀를 만났다.
″아니 뒷모습만 보면 지금도 총각들이 따라 가것어요, 아가씨때는 소안도 총각들이 여러 명 죽었을 것 같은디요.?″ ″오매! 참말로 그란가?.″
 소안면 진산리가 고향인 백 해녀는 1남 4녀 중 첫째딸로 태어났다. 완도읍 해녀 6인방 중 가장 키가 크고 항상 미소를 머금고 사는 멋스러운 해녀이다. 


백 해녀는 다소 나이가 늦은 스물 두 살에 제주해녀를 통해 물질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내가 애릴 때부터 우리집 아랫방에 제주에서 원정물질 온 해녀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서 막연하게 해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갖고 그 해녀들을 따라댕기고...″


″나는 스물 두 살에 물질을 배웠는디 해녀로서는 늦은 나이였어. 그때는 스물 두 살이면 결혼해서 애기들을 업고 댕길 나인디 시집갈 생각을 안하고 물질을 한다 한께 아부지가 막 난리여 시집이나 가제 그란다고. 그래갔고 망사리를 보릿대 속에 꼼쳐 놓고 안 줘부러. 그란디 고모집이 같은 마을이어서 고종사촌 언니가 아부지 모르게 물질을 데꼬 댕게서 평생직업으로 오늘날까지 물질을 하고 있당께.″


처녀 때는 마을 앞 짝지에서 헤엄께나 쳤다고 한다. 
″진산리는 마을도 크지만 짝지(해안선이 자갈로 이루어진 바닷가)가 징하게 좋잔애. 우리 마을에 친구들이 겁나게 많했어. 짝지 끝 바닷가를 시끝에라고 불러 거그가 우덜(우리들) 아지트였어. 거기가면 소라가 바다에 쫙 깔아졌어. 그냥 막 주웠당께. 그랑께 다라이에다가 옷하고 점심을 담고 헤엄쳐서 시끝에로 가. 거기서 소라를 잡어서 반찬을 만들어 밥을 먹어.″


″그때는 정식 해녀도 아니고 소중이도 안입고 아무 옷이나 입고 챙피한 줄도 모르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하루내내 물속에서 놀다 몸이 추워지면 짝지로 와서 몸을 데워. 짝지로 오먼 자갈이 따뜻하니 그렇게 좋아, 친구들이 일렬로 짝지에 큰 대자로 누워서 몸을 말려, 참말로 속이 없었제.″           


결혼은 인근 섬의 모도 청년과 중매로 했다고 한다.
″나이가 스물 다섯이 된께 인자 우리 엄니가 난리여 저것을 시집보내야 쓰것인디 어짜까하고.... 그란디 우리 마을에 남편 될 사람 친척이 살었어. 그래서 그분 소개로 선을 보고 그냥 결혼을 했지. 결혼식은 구식으로 했는디 신랑이 기계배(GO라는 조금한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친구들이랑 왔어. 기계배라 해도 쬐간한 목선인디 파도와 바람과 싸우며 한시간 이상을 오니 어찌것어. 바람을 맞어갔고 신랑이고 친구들이고 몰골이 말이 아녀. 신혼여행도 없이 시댁에 들어가서 딸을 낳고 키우다가 읍으로 나왔제.″


시집 가서는 물질을 안했다고 한다.
″결혼하고는 신랑이 물질을 하지 마라 해. 이삔 각시 얼굴 상한다고. 그래서 모도 시댁에 살 때는 물질을 안했는디 읍에 나온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또 할 일이 없어, 그래서 미역공장을 댕기까하고 몇 번을 가 봤는디 하루내내 앉아서 일한께 나하고는 안 맞어. 그래서 몇 일 하고 말었어 그란디 연비연비로 물질을 다시 시작했당께. 몇 년만에 바다에 간께 그라고 좋듬마.″

 

 

백 해녀는 해녀가 되고나서 난바르도 많이 다녔다고 한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우리 동내에 해녀배와 해녀들이 많았는디 나는 첫해(스물 두 살)에 겁도 없이 돈을 벌어 보겠다고 진도 조도로 난바르를 따라갔어. 조도라 해도 주변에 섬이 겁나게 많애. 보통 10명 정도가 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하면 다음 날부터 물질이 시작된디, 우리집이 종갓집이어서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삼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거든. 그란디 첫 난바르를 간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고 집에 오고 싶은거여. 좁디좁은 배에서 먹고 자고 하잖애, 저녁이먼 날마다 이물(배의 앞부분)에서 소리죽여 울다가 참고서 물질을 마치고 왔당께.″


″그때 조도바다는 그렇게 깨끗하고 뜸부기(듬부기, 바다의 청정지표를 나타내는 해조류로 지금은 진도를 제외한 남해안의 전 지역에서 멸종 위기종이다)가 톳처럼 질어. 우리는 그것을 뜯어다가 국 끓이고, 무쳐서 반찬으로 만들어 먹고 한조금(15일을 기준으로 하나 물질은 보통 5~8일 정도를 함)물질을 하고 와. 그때는 냉장고가 없은께 반찬 쪼금하고 짜디짠 젓갈하고 된장을 갖고 댕긴디 반찬이 떨어지먼 기스(채취과정에서 흠집이 생긴 전복으로 값어치가 떨어진 전복)난 전복을 갖고 마을에 가서 반찬을 바꿔서 밥해 먹고.″   


백 해녀가 해녀인생에서 남긴 가장 큰 오점이 있으니 그것은 오천(보령시 오천면으로 장고도, 원산도 등 유·무인도 3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서해안 키조개의 산지)으로 키조개 채취를 간 일이라고 한다.


″30대때 오천하고 장흥 수문에서 머구리(다이버가 잠수 장비를 차고 바닷속으로 입수하면 배에서 공기를 주입해주는 스쿠버다이빙 방식으로 장시간 작업을 할 수 있다)방식으로 몇 년간 키조개 작업을 했어요. 근디 오천에 처음 갔을 때 키조개를 하나도 못 캐고 돌아왔어요. 운동화를 신고 물속에 들어갔는데 중심을 잡을 수가 없고 또 낮선 바다에서 파트너가 남자여서 맘에 들지 않아 걍 돌아왔는데 오는 길이 어찌나 멀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그때만 해도 교통도 좋지 않고 자가용도 없는 세상이어서 오천서 출발해서 차를 일곱 번 갈아타고 완도까지 왔어. 그래서 메모지에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타는지 적어갔고 완도까지 왔는디 새복(벽)에 출발해서 캄캄한 저녁에 도착했어, 그란디 그 다음해에는 영미언니라고 그 언니가 자기랑 같이 하자고 가자고 해. 그래서 또 따라 갔어. 영미언니랑 같이 잠수를 시작했는디 물이 깨끗하니 좋더라고 두 번째는 돈을 좀 벌어서 집으로 돌아왔제"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인디 보통 오천을 가면 200만원 정도를 벌어서 왔어,. 당시에는 겁나 큰 돈이었어. 그 후로 몇 번을 더 갔는디 머구리 작업이 겁나 힘든 작업이여 그래서 그만 뒀구만.″          
물질을 한참 할 때는 친정엄마가 애들을 돌봐줬다고 한다. ″완도읍에 나와서 아들을 낳았어요, 3~40대 때는 한달에 20일 물질 할 때도 많했는데, 애들도 키워야하고 물질도 다녀야하고, 살림도 해야하는데 친정 엄마가 나와서 애들을 키워주니까 모든 것이 해결됐어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엄마의 희생과 고마움은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어요.″  


50대 때 신장이 안 좋았으나 약물치료 이후 건강을 회복하여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나 최근 들어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는 백 해녀는 ″나는 해녀같이 존 직업이 없다고 생각해, 바다속에 들어가면 편안 해, 거기서 수영으로 운동하고 돈도 벌고, 지금은 옛날같이 물질을 무리해서 안 하잔애, 애기들한테 손 안벌리게 물 때 맞춰서 힘닿는데 까지 할람마.″


고등어를 손질하다 급하게 왔다는 백 해녀는 사진 찍을라먼 화장이라도 쪼간 하고 올것인디 걍 왔듬마 마구 사진을 찍어 댄다며, 아쉬움을 나타내며 인터뷰를 마쳤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