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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김영현 말의 씨 무, 스, 흐, ㄱ, ㄷ, 브 (1)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9.27 10:19
  • 수정 2023.11.05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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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향교
완도향교

완도에는 인물이 많다. 응송 박영희와 소남 김영현은 완도가 배출한 인물 중 교육자요, 독립운동가로서의 그 행적이 뚜렷하다. 두 인물의 특징은 완도향교의 유림이던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국과 완도군을 위해 헌신한 것.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를 올리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완도향교는 완도 설군 이듬해인 1897년 향토 유사 침천 김광선이 건립을 추진하여 어렵게 지어졌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형식을 따르고, 3층 계단식으로 맨 아래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 맨 위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 대성전이다.

당시 대성전은 상왕산에서 벌목한 목재로 지었지만, 예산부족으로 목재 조달이 어려워지자 고심 끝에 동재는 고금도진 동헌, 서재는 신지도진 동헌, 명륜당은 노화 삼도진 동헌을 뜯어낸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향교를 세운 김광선(1860~1936)은 고금도에 유배 온 이도재(1848∼1909)를 만나 배움의 길을 열었다. 고금도 청룡리 용지동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소남 김영현이다. 부친에게서 교육을 받은 소남 선생은 성인이 되자 불목리에 정착한 뒤 1910년 융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교원강습소를 수료하여 1911년 고금보통학교에서 신교육을 실시했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 목포지국 기자로 있다가 완도에서 ‘소비조합운동’을 벌였다. “완도는 완도사람들이 지켜야 한다”는 이 운동은 일본 상인들이 피해를 당하자 소남은 검거되어 1심에서 징역 3개월을 언도받는다. 2심인 대구 복심법원에서는 무죄로 풀려나지만, 일본상품 배척에 앞장 선 그의 의지는 지역사회를 교육의 요람으로 이끌기에 이르렀다.  

1923년 소남은 완도군 군외면 교인리에 사립교인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교인학교는 1934년 강제폐쇄 당하여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동명학교로 개교하는데,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일본이 사용을 불허해 영창간이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청해비사, 진한국마한사 등을 저술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 대다수가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소남 김영현 선생의 저서에는 우리말과 관련한 연구내용이 많다. 오늘날 한글이 뜻글이 되지 못하고 소리글이 되고만 것은 옛글자에 분모음 부호인 10모음부가 첨가되어 혼동한 까닭임을 밝히고, 중국 한자는 새나 물고기의 형상을 그렸으나 우리나라의 옛글자는 입술, 혀, 치아, 목구멍 등 발음기관을 나타낸 것으로 보면 볼수록 글자 그 자체에 소리와 함께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기록했다.

한글을 만들기 위한 과정의 내용을 유추하는 그의 문답식 기록에는 세종이 요동에 있는 중국인 학자 황찬에게 성삼문 등을 13번이나 보낸 이유와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참고하던 옥편이나 운고 또는 언해토책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중국발음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할 수 없으므로 중국발음과 똑같이 할 수 있는 동국정운을 만들어 백성을 가르치고자 정확한 한자발음과 운의 고저를 확인하러 13번이나 요동으로 왕래한 것임을 밝혔다. 

집현전부제학을 지낸 최만리가 한글창제를 반대했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최만리가 고대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우리 고유의 글을 어떻게 반대하겠습니까? 세종대왕이 동국정음을 중국어음으로 번역하기 위하여 창작하신 'ㅎ', ‘ㅸ’ 등 새로운 글자를 반대한 것으로 본다"며 최만리의 상소문을 인용한다.

한글 창제와 관련한 소남 선생의 주장은 "어떠한 물건을 막론하고 일시에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 오랜 세월을 두고 고치고 또 고쳐서 완성되는 것이다. 중국의 한자도 처음에는 새와 물고기의 모양을 본떠 그렸고, 우리 한글은 입술과 혀의 형태를 그렸으며, 모음도 '아래아(.)' 하나로 통용하다가 시대가발달하고 생활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 10모음으로 발전한 것이다"며 주장을 편다. 

그리고 고대의 나라 이름이나 지방 이름이 고문자인 옛날 우리 글자로 되어 있어 후세들이 우리글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한자의 발음이 평안도에서 사용하는 어음으로 되어있기에 고구려시대라 한다"며 말의 씨인 원어의 예를 들었다.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간 발해에 발해문이 있었다면, 그의 모국인 고구려에 고구려 문자가 없었겠느냐?"며 말에는 씨가 있다며 말의 씨 원어를 연구했다. 

우리말만으로 그의 수는 한이 없으나 이것을 말소리로 분류하고 말의 뜻으로 규정하여 어원을 찾아 올라가면 최종에는 7음으로 된 7대 원어 '무, 스, 흐, ㄱ, ㄷ, 브'를 발견할 수 있으니 이른바 원어인 말의 씨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의 고대어 연구를 이렇게 시작했다.

소남 김영현 선생은 고구려의 왕과 우리의 고대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글과 고대문자를 심도 있게 연구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 ‘진한국마한사’는 최근 전남지역을 토대로 형성된 고대유적 발굴의 중심인 마한의 역사와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말 한글과 우리말의 모태가 된 고대어를 연구한 기록이다. 그는 완도군이 배출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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