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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케 하려거든 역사를 배우게 할 것

금일읍민과 함께 금일문화지 꿈꾸는 완도문화원 금일지회장 한승옥 님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3.09.22 09:18
  • 수정 2023.09.2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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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맞서 싸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조직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
1921년: 독립군 총사령관 임명
1927년: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임명
193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임명 1943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타계

 

항일독립전쟁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일제강점기 독립군 최대의 전투였던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장군은 연해주 이주 100년만인 지난 2018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최근 윤석열 정부 들어 국방부에선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에 대해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은 독립운동 업적과 달리 평가해야 한다며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국방부의 유감 표명에 당시 기자회견장에 참석해 있던 기자들의 질문. 


먼저 홍범도함 함명 변경과 관련해 한 기자는 "해군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한 국가가 함명을 변경한 전례를 보면 나라가 망했을 때나 그리고 히틀러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경우 말고, 그 외에 또 다른 선례가 있느냐?"
국방부 대변인은  "확인해 보겠다"며 회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관련 입장문을 포함해 국방부를 향한 기자들의 원성이 이어졌는데, 한 기자는 "어제 국방부의 입장문은 국방부 출입기자로서 우리 국방부 인문학적 소양이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되게 안타깝더라고요. (...) (어제 입장문은) 전반적으로 재검토가 필요하고, 나중에 상당히 문제가 될 만한 입장문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또, 국방부 관계자는 "확인해 보겠다" "입장 정리 중" "검토 중" 등 애매한 답변만 늘어 놓았다. 
한 출입기자는 대변인을 향해 “빨치산이란 말은 파르티잔(partisan 비정규군)에서 넘어온 말이잖아요. 이건 비정규군이잖아요” “이 당시 우리나라는 군대도 없고 국가도 없는데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모두 (게릴라전을 펼친) 빨치산이잖아요" "다 비정규군인데, 이걸 가지고 6.25 전쟁과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에 (6.25 전쟁 직후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 활동한 걸, 빨치산이라고 하면" 


"이게 얼마나 부끄럽고 또 얼마나 천박합니까?”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에 가입된 상태에서, 봉오동하고 청산리에 참가했으니 이것이 다 문제가 있다는 논리인데, 1920년대 빨치산하고 1950년대 김일성과 스탈린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김일성이 그때 몇 살이었어요? 김일성이 1912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빨치산 자격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고. 이게 문제가 된다. 이게 어떻게 문제가 됩니까? 이렇게 어설프게 역사적인 식견도 없이..."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을 사주해서 6.25 남침을 한 공산당은 스탈린의 공산당이에요"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레닌의 공산당하고 스탈린의 공산당은 아주 다릅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 더 커요. 근데 그것을 같은 공산당이라고 봐 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국방부에서 공문서로 이렇게 내서 기자한테 줘버린다는 것은 이건 문제 있죠. (국방부가) 역사 논쟁에 끼어드는 건 좋은데, 역사 논쟁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치열하게 하는 거고 정확하게 하는 거거든요." 


질타는 계속됐다. 
국방부 출입기자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이력이 문제된다. 이렇게 쓰셨고.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이게 잘못됐다는 뜻이죠?"라고 물었다. 전 대변인이 또 다시 확답을 못하자 그 기자는 이렇게 되물었다.


"이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공산당,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독립군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독립군을 억지로 통합했다. 이렇게 읽혀요. 이 당시에, 이게 맥락이... 확인을 하고 쓰신 거예요, 도대체 이게? 그런데 갑자기 바꾸면 어떻게 해요, 이 자리에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논란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한 기자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을 했느냐고 물어봤어요"라며 "그러니까 그게 맞다 그랬다는 거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는 내용이 되거든요"라고 묻자, 국방부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씀드렸다면 제가 잘못 (답변) 드린 것 같다"며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왜곡에 대해 역사학자들보다도 기자들이 저렇게 나섰다.

 

어떤 형태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침, 김남철 필진이 남도 의병에 대해 책을 출간했기에 창간주간을 맞아 2회 연재했었는데, 의미가 있었다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지난 주말엔 서을윤 전 행복복지재단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금일읍의 완도신문 독자분이신데,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김남철 필진의 의병과 관련해 금일에는 그러한 의병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싶다고. 


흔히 경제 위에 정치 있고, 정치 위에 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문화 위에 역사와 종교가 있다. 
그 만큼 높은 식견가 의식이 요구돼야만이 관심을 갖게 되는 분야가 역사인데,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를 말할 수 있는 즉, 임금 행차 때 선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임금에게 의견을 말하는 언로(言路)다.  


금일읍 동백리가 고향인 최광윤 과장에게 물었더니, 최 과장은 "과거에는 수산가공공장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금일읍 사회단체장도 하시고 금일중고 육성회장 등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겸손하신 분으로 알고 있어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고 귀뜸했다. 다시 서을윤 전 이사장에게 인터뷰를 청해주십사 정중히 부탁.


한승옥 님. 1947년생. 금일읍 도장 1길에 거주. 현재 완도문화원 금일지회장을 맡고 있다. 한 지회장은 과거 금일 청년회장을 비롯해 번영회장, 국제로터리클럽회장, 금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장을 맡을만큼 지역 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완도문화원 금일지회장을 맡으면서 금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일읍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나 유적지가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고. 승옥 님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에서 한산도를 거쳐 여수 진남관, 고금 충무사, 해남 울둘목을 오가는 중에 금산과 금당 사이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했으며,(임진왜란 때 왜군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로 침범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목인 절이도에서 적함을 맞이하여 싸웠던 절이도 해전인 듯) 금일읍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와 항일 투쟁의 징표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바람으로 다양한 사료를 찾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의병 활동으로는 김성한 의병대장이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금일읍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 후 월송리 골짜기(의병골)에 잠시 묻혔다가 가족이 인도하였다는 구전되고 있고 금일읍에서 당시 기념비를 세웠다고. 이와 관련된 사료를 찾기 위해 장흥군 대덕읍 향토문화연구소장에게 협조를 구하였고 조회 결과 김성한은 장흥읍에서 처형되었는데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전했다.


더불어 해상의병에 대한 전투 기록이 존재하지 않고 일본 어선이 우리 지역을 침탈했다는 기록 등 우리 지역에서 이뤄진 해상 의병활동 등의 자세한 기록을 찾고 싶은데, 이런 사료들이 있다면 금일 읍민들이 힘을 합쳐 금일읍만의 문화지를 만들어 후세에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웠던 순간에 대해 한승옥 지회장은 구전은 있으나 실질적인 사료들을 발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기뻤던 순간에 대해선 금일읍과 관련된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역사적 기록과 구전 등 관련된 사실을 접했을 때 가장 기뻤다고.


고마웠던 사람에 대해 현재까지 금일읍 역사적 사료를 찾기 위한 일을 함께한 사람이 없어 다소 아쉽지만 앞으로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나타나면 가장 고마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며,
한승옥 님은 ”일본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고 또 강요했는가? 조선시대 부터 수시로 침투하여 노략질 및 학살을 감행했고, 최근까지도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깨끗하고 육지보다 큰 소득을 올리고 있는 바다를 후세에게도 물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는 등에 행위에도 어떤 조치는 커녕 방관만 하고 있는데 후세에 바다를 깨끗하게 지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 가 크게 염려된다“고.


해군 정규군을 이끌었던 이충무공 또한 궁핍한 처지에 이르자, 12척의 배를 인수해 파르티잔(비정규군)처럼 남해안의 섬과 바다를 통해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았으며,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전형적인 게릴라전의 특징이었는데, 이후 동학농민혁명군과 항일 의병들 또한 이러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역사에 비춰 볼 때, 모든 항쟁의 끝은 섬. 섬은 마지막 항전의 땅이고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했던 마지막 보루였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나라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는 말을 실감케하는 한승옥 님의 아름다운 말의 씀이다.  
그 역사를 지키고픈 한승옥 님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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