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는 고금도와 마찬가지로 고인돌이 많이 분포한다. 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고인돌이 도서지역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도서지역에서 고인돌을 형성한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지금도 난해한 상황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당시 학계에서도 도서지역의 고인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드문드문 그 형태가 드러나기도 했거니와 큰 관심거리가 아닌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여기에 더해 선사시대 인류가 아주 미개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륙의 고인돌 세력이 뗏목에 큰 바위를 싣고 와서 몇몇의 고인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청산도에는 독특한 방식의 장례문화가 전한다. 그것은 초분이다. 초분은 죽은 사람의 유골을 처리하기에 앞서 먼저 육신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수서 고구려전, 그리고 삼국유사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장례문화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고.특히,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에 남아있다. 고대유적 발굴을 통해 영산강 위주로 세력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했던 마한의 문화가 청산도에서도 지난해 고분 발굴 조사결과 확인됐다. 초분은 해안지방에 주로 형성된 장례문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지
고래잡이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고래잡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우리나라에 있다. 국보 제 285호로 지정된 울진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바위에 그려진 고래그림과 고래잡이 모습의 발견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최소한 7500년 전의 인류가 고래잡이를 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래잡이는 우리의 풍속이기도 했다. 1816년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에서 유배한 손암 정약전이 죽고 나자 1822년에 정약용의 제자 이청은 손암이 편찬한 자산어보에 없는 부분을 보완했는데, 그 중에 고래(경어鯨魚)라는 항목도 넣었다
선사시대 인류가 완도의 여러 섬에 정착했고, 그들이 사수도 해역을 생활거점 삼으면서 해양문화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질서유지를 위해 집단을 통제할만한 제도가 필요했다. 인류가 살아가면서 사후세계의 두려움과 변화하는 자연현상 적응을 위해 개척해야 할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었다. 그래서 종교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 나려고 구원의 수단으로 종교를 만들었다. 종교는 권력의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았다.자연 숭배사상이 발전하면서 영
비교적 완만한 구릉이 발달해 선사시대 사람들이 거주하기 알맞은 지형이 우리지역 지표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2000년대 이르러서야 선사시대 유적 발굴이 이뤄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그동안 우리지역은 해안지대를 둘러싼 개발행위가 수없이 이뤄졌고, 수산업의 발달로 인한 양식어가 증가로 해안지대 유적들은 알게 모르게 발굴조사도 없이 파괴되어 왔다.우리지역에서 미약하게나마 출토된 구석기시대 유적의 특징으로는 영산강유역 몸돌석기와 유사하며, 자갈돌을 활용한 몸돌, 격지, 여러면석기, 긁게 등이 확인됐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자갈돌석기
완도의 첫 도래인은 구석기시대의 인류다. 사수도 해역의 신석기 보다 앞선 선사인류의 흔적이 완도에서도 발견됐다. 완도 일원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군외면 달도유적과 신흥구석기유물산포지, 그리고 신지도의 임촌유적 등 세 곳에서 유물이 확인됐다. 그 당시 영산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면서 학계에서는 전남지역 해안가 일대의 유적발견 가능성을 제시했다. 유적 조사 결과 처음으로 호남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것은 군외면 달도였다.국내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실로 우연한 발견이었다. 1978년 주한미군 소속 공군 상병이던
태초의 인류가 천문을 기록했다고? 그것이 사실일까? 믿거나 말거나가 아닌, 이것은 진짜이야기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은 돌에 지도까지 새기며 자신들이 사는 지역 내에 사냥감이 많은 곳, 파도가 높은 곳, 늪지대 등 위험요소를 표시해 사용했다.고대인은 천문을 관측하고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다뤘다. 그것은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적 권한이었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성혈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돌에 표현한 것으로 학계는 연구 결과를 속속 발표했다. 우리나라 고대유적에 표시한 별자리는 중국에서 발견된
호모 하미오타(homo hamióta), 낚시하는 인간을 뜻한다. 낚시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발견된 낚시에 관한 기록은 구석기와 신석기의 중간인 중석기 시대에 가장 많다. 기원전 1만년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에 고기 잡는 방법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예를 들면 짐승의 뼈로 낚싯바늘을 만들거나 사슴뿔로 작살을 만들어 온갖 덫으로 고기를 잡았던 흔적들이다. 인류 최초의 고기잡이는 낚시가 아니었다. 물이 바닥까지 드러나면 맨손으로 잡는 기회주의적 사냥방식이었다. 고기잡이가 쉽지 않아 육지에서 맹수를 사냥할
지난 2005년 목포대학교 유적조사팀은 여서도 패총발견 외에도 완도군의 외딴섬 여서도에서 구멍이 새겨진 바위를 무려 15개나 발견했다. 여서도에 정착한 고대인은 바윗돌에 구멍을 내어 무엇을 전하려했던 것일까? 큰 돌에 새겨진 크고 작은 구멍들, 이것을 성혈바위라고 한다. 성혈(性穴)은 바위의 표면을 돌로 찧어서 오목하게 파낸 원추형의 홈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홈구멍, 알구멍, 별집바위 등으로 표현한다. 성혈은 고대인의 신앙과 관련한 별자리 새김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한편에서는 선사시대의 암각화 같은 그림이나 형상을, 또 근대까지
패총은 해안가에 살았던 사람들이 먹고 버린 어패류와 각종 생활 쓰레기가 오랫동안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쓰레기 매립장이다. 조개껍질의 석회질에서 나온 탄산칼슘은 산성토양에 취약한 어패류와 동물의 뼈 등 다양한 유기물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무수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은 쓰레기 더미에서 선사시대 고대인의 역사와 문화, 그들이 살았던 자연환경이 그대로 남아서 패총을 타임캡슐로 부른다.우리나라에서는 600여 곳에서 패총이 발견됐으며, 어패류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인 서남해안과 섬 지역에서
발전사업허가 이후라도 불가피하게 변경 허가가 필요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사업허가를 획득하였을 때 유효기간은 준비기간까지 연장된다. 하지만, 허술한 법망을 피해 행해지고 있는 업자들의 편법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이 문제를 두고 해상풍력 선두주자인 덴마크는 이미 지난 2009년에 계획입지제도를 도입했고, 미국과 호주 등의 국가도 계획입지제도를 운용하며 민간사업자들이 난립하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해상풍력사업이 진행된 타 지자체를 보면 공공의 바다에서 이미 업자들의 복마전은 시작됐다.이
편집자 주> 제주도의 최북단 유인도 추자도에서 23.3km, 전남 완도 남단 소안도에서는 18.5km 떨어진 21만4000㎡규모의 무인도인 장수도(사수도) 를 둘러싼 두 지자체간 분쟁 이후, 최근 들어와 다시 이곳 해역을 두고 분쟁이 시작됐는데, 본보에선 완도 사수도와 관련한 역사적 근거와 주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위해 지난 정부가 인허가 기준을 완화했다. 그 틈을 타고 해상풍력 발전사업자가 증가해 풍황계측기가 우리바다에 난립했다. 풍황계측기 허가 건수는 10건에서 지난 정부 들어 166건으로 수
기후변화는 지구상의 인류가 당면한 최대 난제 중 하나다. 어쩌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 세계를 지배했던 에너지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 부작용이 함께했다. 인류가 생성한 문명에서부터 사소한 일상생활의 모든 것까지 자연생태계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생에너지 확대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의 움직임이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편집자 주> 제주도의 최북단 유인도 추자도에서 23.3km, 전남 완도군 남단 소안도에서는 18.5km 떨어진 무인도인 장수도(사수도) 를 둘러싼 두 지자체간 분쟁 이후, 최근 들어 다시 이곳 해역을 두고 분쟁이 시작됐다. 본보에서는 완도군 사수도와 관련한 역사적 근거 자료와 해상분쟁 대비를 위한 주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에 이어 화석 에너지 최대 강국인 중동까지, 전 세계가 지금 수소 생태계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세계 곳곳에서는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많이 발생했다.
제주도가 해상경계 설정에 적극적 행보를 보인 것은 해상풍력발전 사업허가권 선점 때문이다. 제주도가 추진한 추자도 해상풍력발전사업은 추자도 동쪽과 서쪽에 발전기 300기 이상의 세계 최대 규모를 계획하며 많은 논란과 갈등이 있었다.제주도는 추자도가 제주도에 소속된 만큼 사업의 인허가권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음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정부는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육지와 달리 해상은 지역 간 명확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추자도 해상풍력사업이 외국기업의 투자유치로 지난 9월 우리나라 5대 기업과 업무협약을 맺고
제주특별자치도 추자면 예초리에는 사수도와 관련한 기념비가 하나 있다. 사수도 분쟁 초기에 북제주군이 세운 것으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하추자도에서 동쪽 36km 거리에 있는 138.701㎡의 무인도이다. 이 섬을 전라남도에서는 잊을만하면 완도군 소안면 소속 장수도(障水島)라고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1919년 세부 측량 때 예초리 산 121번지로 확정되고 예초리 사람 김유홍(金裕洪) 명의로 등기, 또 1930년 일본인 다나카(田中斗)가 어장 확보 차 매입 등기되고, 조국 광복이 되자 국유지가 되었다. 1961년 추자
편집자 주> 제주도 소속이 된 추자도에서 23.3km, 전남 완도군 당사도에서는 18.5km 떨어진 21만4000㎡ 규모의 무인도인 장수도(사수도)를 둘러싼 두 지자체간 분쟁은 1979년 완도군이 이 섬을 ‘장수도(障水島)’라며 ‘완도군 소안면 당사리 산 26번지’로 지적을 부여해 등록을 추진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그동안 양 지역 어민들과 지자체간 갈등이 지속돼 왔고, 2005년 11월 제주도가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면서 법정 분쟁으로 비화됐다.권한쟁의 청구를 접수한 헌재는 3년 여의 고심 끝에 2008년 12월 26일 “
필자 주>지난 21일, 사수도 분쟁과 관련해 보길도 주민들을 취재에 나섰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취재는 조심스럽게 이뤄졌고, 어장에 바쁜 어민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보길면사무소에서 지역대표 3인을 만났다.취재에 협조해 주신 김현주 보길면장, 김종률 예송리 전 노인회장, 김창근 예작도 이장, 개발위원장 김치국 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다음 주부터는 본보 4면 이슈파이팅에서 사수도와 장수도 분쟁에 관한 내용을 심층 취재, 보도하고 지역민의 제보도 함께 받습니다.“섬사람들은 이네기를 잡아야만 결혼식을 할 수 있었죠”김창
상어배미와 탱자배미가 있다. 여기에서 ‘배미’는 작은 논의 단위를 뜻한다. 보통은 ‘우묵한 논이라서 우묵배미, 쑥 들어간 마을이라서 쑥배미’라고 부른다. 그런데 난데없는 상어배미라니, 그것을 독특한 이름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해남군 송지면지를 보면 금강마을과 월강마을 지명유래지에 상어배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거기에는 '뱃사람들이 상어를 잡아 곡식과 바꿔간 곳'이라는 내용을 짤막하게 적어 놓았다. 유사한 것이 여러 곳 있다. 대부분 곡창지대로 여겼던 바닷가 인근 마을에 붙은 지명들이다.해남 제 1항구였던 어성천을 따라 올라가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이 됐다. 조선시대부터 350여 년 동안 이어진 하의3도의 농지탈환운동인 소작항쟁은 1923년 시작해 일제강점기 식민수탈에 맞서 승리를 거둔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역사이다. 식민수탈로 4할에서 8할로 소작료가 올라가자 암태도 주민들은 소작인회를 조직해 일본에 항거하면서 당시 노동단체, 언론단체 등과 연대해 소작료 인하를 끌어냈다. 이것이 1920년대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농민운동으로 전국적인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완도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소안면 당사리 마을 입구에는 '김석주영세불망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