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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두고 전하려던 소남 선생의 심오함에 대하여 (2)

81세 노익장 연구열에 불타올라
'넌지'라는 산막에서 한국고대사
연구해 독보적인 연구업적 성취
독립운동 연장선 우리 뿌리 찾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0.12 15:24
  • 수정 2023.11.0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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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국마한사’. 지금 듣기에도 생소한 한국고대사인 마한의 역사를 심도 있게 연구한 소남 김영현 선생은 불목리의 ‘넌지’라는 산막에서 반평생 제자를 가르치고 집필에 몰두했다. 1961년 그의 나이 81세, 그런데도 그의 연구열은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노익장의 기개를 펼쳤다. 그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한국고대사를 하루빨리 출판해야함을 제자에게 알리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박한 심정으로 애제자에게 논어를 비롯해 ‘진한국마한사’를 익히게 했다.

책을 출간하기 위한 작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모든 자료는 한자 중에서도 고대어가 대부분이었다. 고대어를 해독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한국마한사를 집필하는데, 苑雲靜(원운정)이라는 필명의 제자는 스승의 산막에서 책상다리로 꼼짝없이 90여 일 동안 스승의 원고를 정리했고, 동아출판사에서 서둘러 책이 나왔다.

이후 그 책은 잊히는 듯 했지만, 2011년 완도문화원이 지역 사료집으로 재발간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내용으로 볼 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책을 집필하는데 도움이 된 제자는 "그동안 얻은 것은 무릎통증과 스승의 책을 집필한 기여도에 대한 뿌듯함이었다"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전했다.

‘진한국마한사’는 신라의 왕호를 비롯한 지명관명과 지금은 그 이름도 찾기 힘든 육가어와 그것을 활용한 고어활용법, 그리고 우리 학계에서 조차도 들어보기 힘든 한글작법인데, 그것은 독보적 연구업적이라며 학자들이 평가했다. 

소남 김영현 선생은 ‘진한국마한사’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가 말하려고 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역사이면서 고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이어온 마한의 역사를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베일 속에 감춰진 마한의 역사를 소남 선생은 하나씩 해부하면서 제일 먼저 언어를 연구했다. 우리글인 한글의 쓰임과 고어의 활용법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체계적이고도 심도 있게 연구를 한 것이다. 

책 내용에서 관심을 끈 것은 고대의 어형도, 인체도, 인면설, 가족도, 천체도설, 지체설, 방위설, 연중계절행사도, 도설, 6축도, 윷놀이설 등이다. 그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우리글이 발전해 온 유형과 고대어를 통해 형성된 언어의 발전상을 세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가 집필한 내용 중에서 일반의 관심을 끈 것은 동,서,남,북,중 5방위를 사용한 중국의 예시와 마,나,사,하,가,다(아래아 한글식) 우리의 6방위에 차이를 둔 것. 그는 순서대로 말, 원숭이, 소, 양, 개, 돼지를 인용한 고대어의 변천사와 활용법을 연구했다. 

그가 연구한 고어활용법에서 하나의 결점을 말하기도 했는데, 똑같은 명칭이 서로 다른 사물에 겹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예로 산을 뫼로 땅의 우두머리, 조류인 매를 새의 우두머리, 제사 지내는 밥을 묏밥으로 제물의 우두머리, 형벌인 태를 매질로 모든 형구의 으뜸으로, 마석을 멧돌로 가구 중의 으뜸으로, 말소리는 같지만 각각 다른 용도의 것에 대입되는 고어활용법을 기록했다.

그의 연구는 특별하고 심오했다. 그러면서 연구를 확대한 것은 국가 중에 으뜸을 마한으로 정하며, 마한왕은 고구려의 왕 '주몽'이라며 대단원의 결정을 내린다. 선생의 책을 접하고 1년 넘도록 그 책을 넘기는 횟수가 더 늘었다. 책 내용대로 하나씩 대입하며 조사 할수록 지금 발굴하고 있는 우리 문화유적의 결과를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소남 선생은 죽기 전에 이 감춰진 비밀을 후세대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 우리네 고대사를 연구하고 남겨서 후대에 물려주는 작업은 독립운동가들의 최대 과업이었다. 대표적인 분이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단재 선생은 뤼순감옥에서 고조선의 역사를 집필하다 숨을 거뒀다. 그가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연결되는 미완의 글을 남겼지만, 그가 집필한 ‘조선상고사’는 후세들에게 귀한 자료로 남게 됐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과 홍범도 역시 우리 고대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등 모든 독립투사들은 우리의 고대사를 중요하게 다뤘다. 

찬란한 우리의 문화와 민족의 뿌리를 지켜야한다는 의지였던 것. 일본이 빼앗고자 한 것은 우리 국토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까지도 빼앗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푸른 대숲이 찬란했던 죽청리에 자리한 완도향교는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곳이다. 소남 선생이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기고자 애쓰셨던 것은 바로 우리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한국고대사에 대한 비책이었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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