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가 없어지면 그 허전함이 또 채워진다. 산과 들에 알곡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다. 쓸쓸함이 비 공간에 채워진 것도 사람만이 느끼는 특권이다. 뜨거웠던 지난날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아왔는가. 떨림의 눈물이 아름다웠다. 누구든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시대를. 시간이 가면 갑자기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을 우리는 모르고 살 뿐이다. 지구 멀리에서 푸른 지구를 보면 가장 큰 언덕에서 살고 있구나. 평화의 땅에서 작은 꽃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발길 아래에서 작은 풀꽃들이 멈추게 한다. 우연한 만남
낙목한천의 계절이 다가 오고 있다. 아직은 낙엽이 달려 있어 늦가을 분위기는 있다. 계절의 징검다리에서 느껴오는 것은 개인의 감성 따라 다르겠지만 전체적 풍경은 그 계절에 따라 펼쳐질 것 이다. 요즘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덩굴성 식물은 담쟁이 잎과 송악이다. 송악은 사철나무다. 잎이 푸르지만 봄에 새잎으로 단장한다. 물론 새순은 연하고 보기도 좋다.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살아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우리 어머니가 지나가는 자리는 늘 향기롭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나올수록 그 향기는 진나다. 낙엽이 지고 빈자리가 생긴다. 이럴 때
날이 싸늘해지면 국화꽃이 내 곁으로 온다. 산 넘어 피는 국화꽃도 가까운 산 밑으로 왔다. 따뜻한 된장국도 먼저 내음을 데운다. 나보다 먼저 그리운 사람이 생각난다. 낙엽을 보면서 지나온 일이 생각나는데 그 사연은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직 살아있겠지. 인생은 돛단배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가지만 실낱같이 희망을 품어본다. 보일 듯이 말 듯이 삶은 운명처럼 떠간다. 새벽달은 유난히 밝다. 그 곁에 초롱초롱한 별이 있기 때문이다. 낙엽 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처마의 풍경소리는 이따금 내 마음을 울린다. 커피 향기 그윽한 곳
새벽에 찾아오는 손님은 봄이다. 무엇인가 새롭고 설렘이다. 어린 날에 봄 소풍이 잡히는 날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룬 적이 있었다. 봄은 새롭게 채워지는 기쁨이다. 살아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그런데 새롭게 생명의 싹을 보니 낳고 자란 기쁨의 미를 모두 감득할 수 있다. 가을은 공간의 미다. 채워지는 것보다 비어있는 공간이 아름답다. 그 공간에 이따금 가을의 열매가 정점을 이룬다. 미적분 함수에서 미분계수를 순간변화율이라 한다. 최대 극한값으로 가는 과정이 최댓값이다. 그 직선의 기울기는 우리 인생에서 가지는 각각의 개성이다. 이것을
처음과 나중 그리고 처음과 처음 사이는 꼭 걸쳐야 하는 시간이다. 생명이 시작하기 이전과 이제 생명이 시작하여 그 여정을 걸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가지려고 했는가. 고민이 깊었을 때 시간이 그 답을 가지고 있다. 이제 현재의 순간에서 수없이 시간을 나눈다. 그만큼 하루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루에 먹을 식량이 정해져 있고 하루를 살아갈 시간과 공간도 정해져 있다. 이 한계점에서 조용히 받아들일 일이 있는데 생명이다. 이제 한해살이풀들도 그 짧은 기간에 맡은바 소임을 다했다. 들판에 추수가 한창이다. 그 시절 푸르던 날을 뒤로 하고
가을 텃밭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 배춧잎 보다 더 큰 세상이 앉아 있다. 목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저곳에 있는 푸른 세상이 경이롭다. 하나의 초록 별은 그 많은 세상을 담고 있다. 내 마음의 경영은 바로 텃밭이다. 배추, 무, 마늘, 파, 시금치를 보면 어느새 눈이 맑아진다. 해가 짧고 기온이 내려가면 초록 색깔은 점점 진해진다. 우리 마음의 빛깔도 그렇다. 옷깃을 여민 억새는 이 계절 가장 절제된 모습이다. 가을을 노래 하려면 이런 모습으로 들어와야 한다. 가을 텃밭은 지구의 푸른 별, 그 별 하나 머리에 이고 우주 여행을 떠난다
스스로 그리움에 젖는다. 옆에 있어도 그립게 보고 싶다. 많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 사무치게 그립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른 데에는 그리움을 많이 채우라는 뜻도 있을 거다. 이제 오후 가을 햇살이 닿는 곳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10월에 햇살은 은유의 색깔이 있다. 그리움으로 칠해진 수채화가 날이 갈수록 다르다. 10월의 꽃 중에 제1막은 쑥부쟁이, 취나물 꽃, 산국화, 강활, 억새꽃이다. 이렇게 한데 모여 피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생명이 짧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서 피는지도 모른다. 꽃이 질 때보다 활짝 필 때가 더 서럽게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가 행복함을 느낀다. 간단한 사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야말로 얼마나 소중한가를 명약해진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항상 기댈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서 아주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다. 운명은 시간이란 좌표에 놓여있다. 시냇가에 작은 돌멩이도 시간의 흐름으로 밋밋하게 다듬어진다. 우리는 얼마나 살아봐야 시간의 흔적을 알 수 있을까. 시간의 예술은 음악이다. 시간의 간격이 섬세한 음률을 만든다. 이 속에 눈물이 있으므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음이 모여 하나의 곡이 되듯이
고향은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다. 우리가 낳고 자라는 곳을 다시 찾고 싶은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고향은 맑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논 한 마지기에 나락이 몇 섬이 나오는지 관심이 없었다. 단 그것이 삶의 밑천이 되는 줄만 알았지만 세어보지는 않았다. 아무 욕심 없이 친구들과 놀기에 바빴다. 친구들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푸른 하늘을 보았던 그때가 가장 깨끗하였다. 미래에 대한 이상만 꿈꿨기에 현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지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그리움의 향수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흰 빨래가 가을하늘을 날리고 있다. 때가 빠지고 무게가 가벼우면 마음도 뽀송하다. 낮달은 저녁별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깨끗한 가을 하늘을 만든다. 멀리 있을수록 눈을 감고 기도하게 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시간이 가장 깨끗한 길을 만든다. 몇백 광년 지나야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전달될 수 있는 거리다. 그 여정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아마 생각하는 것들이 멈춰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안으로 묵혀두기로 하는 것들이 쌓일수록 가만히 눈을 감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 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맑고 깨끗한 곳일수록 멀리서 바
과거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적 사실들이 모르게 지나가는 것들도 많다. 현재의 순간에서 새롭게 알게 되면 과거도 변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야생화도 물가에서 새롭게 역사를 쓰고 있다. 노란 땅귀개와 보라색 이삭귀이개는 습지를 좋아한다. 이곳에 있어야 하나의 생명으로서 탄생할 수 있다. 귀이개는 아주 작은 수저 모양이다. 우리의 선대들은 생활에서 쓰이는 이름을 본 떠 이름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친숙하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이름도 있다.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밥풀은 각각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
목이 길어서 흔들리는 가을. 그 배경이 고요하기 때문에 가느다란 목이 보인다. 어느덧 찬바람이 나니 목을 불쑥 올라온다. 나락, 코스모스, 쑥부쟁이, 강아지풀이 달그림자까지 올라온다. 누가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릴 것 같은 초가을은 애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단조롭게 타전을 친 귀뚜라미는 현재의 고요함을 누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일까. 계절은 수많은 꽃을 피고 지게 하는데 그것은 아마 쓸쓸함을 알기 위해서다.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선 아주 천천히 단조롭게 걷는다. 마치 음악 캐론 코드처럼 단조로운 코드 진행으로 반복해서 듣는다고 해도
9월이라 하면 참으로 듣기가 좋다. 많은 식물이 하나의 정점으로 수렴될 것이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다양한 모양이 그려진다. 별이 펼쳐진 우주에도 둥그런 원으로 그려질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 한계가 무한한 공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물질적인 한계에 있다. 그러나 신은 그 물질을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실상이 있다는 것이다. 깨알 같은 작은 열매 속에도 별빛 같은 빛이 나온다.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연꽃 속에 한 생명
8월에 바닷가에서 자란 야생화는 순비기나무와 대나물 그리고 갯메꽃이다. 순비기나무와 대나무는 바위틈에 자라고 갯메꽃은 모래밭에서 자란다. 바닷가 야트막한 산에선 백합과 노랑 원추리 꽃이 핀다. 뱃사람과 섬사람들을 오고 가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 있다. 바닷가 언덕과 작은 섬들의 땅은 천박하다. 빗물이 혹시 머물다 갈 수가 없다. 오자마자 흘러버린다. 우리의 인연도 옷깃을 단정하게 차릴 시간이 없다. 방금 지나버린 시간도 잡을 수 없어 아쉽다. 순간순간 정이 쌓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린 날에는 좋아하는
석잠풀, 누리장나무, 파리풀, 며느리밥풀, 개암나무 열매, 달개비, 꼬리조팝나무, 익모초, 달맞이꽃, 싸리꽃 등이 8월에 피는 야생화다. 이중 달맞이 꽃은 밤에 핀다. 8월의 별자리는 게자리다. 아침에 해와 같이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진다. 그러나 태양과 같이 있기에 볼 수가 없다. 게자리부터 궁수자리까지 6개의 별자리를 태양 빛 때문에 볼 수 없다. 1개월이 지나야 하나가 빠지고 하나가 더해진다. 어찌 보면 태양과 같이 동행하는 삶인지도 모르나 지구가 공전하기 때문에 위치가 바꿔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시차라고 말한다
노랫말에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속 헤매냐”라고 하였는데 송학사는 그리움의 상징적으로 썼을 것이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가면 이름 없이 꽃들이 보인다. 깊은 계곡에 무릉도원이 있을 것인데 여기에도 산꽃이 있다. 원초적 본능에 그리움이다. 꽃과 물 그리고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삶의 근원을 파헤친다. 조용히 음미하고 있으면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이 들린다. 자주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그중 프레드릭 쇼팽 작곡가 지은 피아노와 가곡을 듣는다. 꽃과 피아노 선율은 하나이다. 깊은 산
밭에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지난 강풍에 쓰러질 듯하였는데 다시 일어나 잘 자란다. 하나의 씨앗이 이렇게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마치 산달이 들어서는 것처럼 생기가 넘친다. 붉은 유홍초는 나팔과 속하며 얼마나 생명력이 강인하지 밭을 경영한 입장에선 아주 귀찮은 존재다. 보라색 나팔꽃도 저 스스로 밭둑에서 자란다. 8월의 꽃은 사위질빵이다. 8월에는 다소 꽃이 귀한 달이다. 그런데 이 꽃이 있어 들판을 향기롭게 한다. 봄에 찔레꽃 향기가 있다면 여름에 사위질빵 꽃 내음이다. 향기가 가벼우면서 코끝에 맴돈다. 평생 이런 사람하고
산에 꽃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줄 것만 생각하고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에게만 실천하는 게 윤리와 도덕이다. 고운 옷을 입지 않아도 향기가 풍기는 사람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하려는 했으면 그날 실천하는 사람은 눈빛이 살아있다. 산에 꽃들은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아름답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에서 토담집은 기교 없이 간소하게 그렸다. 소나무 한 그루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신세계가 숨어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기보다는 느낌으로 단순화하면 된다. 가만히 있어도 서로 배경이
시간의 언덕에서 60대는 새로운 인생의 항로로 향한다. 이 꽃 저 꽃을 보면서 시간이란 초점이 보인다. 지나버린 세월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열망이 서로 섞여 내일이란 담보로 오늘은 아쉬움과 가슴앓이했다. 장마 끝에 여러 꽃이 얼굴을 내민다. 내가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른 꽃들이 순간순간 얼굴이 내민다. 지난날 수 없는 계절이 와서 내게 손을 내밀 때 난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조건 합리적이고 그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가치인 줄 알았다. 네가 있고 내가 없으면 불평하기 일쑤였던 지난날은 부정적인 날이 더 많았다. 인생은
끝없이 꽃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깊이를 재기 위함이다. 노란 꽃은 길을 떠나 나그네가 되었다. 이제 하얀 꽃이 끝없이 바라보고 있다. 나의 이기심과 오만을 버리고 꽃을 끝없이 바라본다. 기찻길 옆에서 촘촘하게 부서진다. 눈부신 초록빛 들판에서 이미 지나버린 것에 대한 파란 만년필이 기억하고 있다. 꽃 한 송이 보낼 힘이 없을 때 초록 들판이 와서 눈부신 꽃이 된다. 먼지 한 톨이 내 가슴에 씨앗을 돋게 한다. 언제나 함께 있지만 저 산만큼 멀리서 서 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꽃들은 무게도 없이 하늘만 쳐다본다. 침목의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