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추가 걸리면 아들. 솔가지만 걸리면 딸이었으니 금줄은 그야말로 탄생의 상징과 기호였다.금줄의 역할은 무엇보다 잡인 출입 금하기다.아기가 보고 싶은 친인척일지라도 삼칠일(21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산모는 삼칠일 동안 미역국을 먹으면서 조신하게 몸조리를 하였고, 삼칠일이 지나야 비로소 해방되었으니 금줄은 닫힘과 열림의 경계선이었고, 삶과 죽음의 성역에서 안전을 보장받았던 샘이다.미신으로 치부될 수 있는 금줄이지만, 이 금줄에는 인간이 태어나자 마자 길흉화복의 운명을 가진 존재란 걸 보여주고 있는데, 나의 운명을 누군가가
송징의 항몽의거 장도 주민들이 몽골의 압박에 의한 노역에서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1274년 10월 20일 태풍도 없을 때인 일본 1차정벌 때에 대형선박이 부족하고 또한 좋은 목재로 배를 만들지 못해 조그마한 풍랑에도 바위에 부딪쳐 파손되었고 일본으로 출정한 군사의 절반만 살아서 돌아왔다. 이를 두고 일본은 가미가제(神風)라고 기고만장하는 단초가 된 것이다.임억령은 미적추(米賊酋)라고 송징을 말한다. 쌀 도적질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시 완도 부근을 지나는 선박을 불러 세워 조운선이나 세곡선을 검열하여 강화도 고려정부에 가는 물
산 아래 또 산이 있다. 아무리 작은 풀꽃이라도 다시 봄 산이 되고자 초록의 옷을 입고 있다. 여러 물길이 모여 하나의 세상을 되고자 푸른 강물이 된다. 온몸으로 꽃이 되고자 숱한 흔들림 속에서 뿌리는 더욱 강건하리라. 반짝이는 잎새는 섬세하게 햇빛을 받아 하나의 푸른 산을 만든다. 산에서도 쉬지 않고 길을 가고 있다. 들판에서도 쓸쓸한 사람이 서 있는 듯 걸어가고 있다. 온 산이 그 푸름을 잊고 고개 넘어 철새 소리가 넘어온다. 꽃은 여기저기 정답게 피지만 산허리는 바람을 뒤로하고 세월을 남김없이 어디론가 길을 떠나고 있다. 쓸쓸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오는 길을 알고 있을까?거친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쳐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오는 길이 사라지더라도 나란 존재는 나를 무한히 확장시켜 너를 포용하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을 예비하는 일이 바로 기다림으로 그 기다림 안에는 생명과 사랑이 숨을 쉬는 우주의 태동이 뛰고 있어서 그 기다림의 뜀이 없는 나는 황야를 방황하는 것과 같다.생명과 사랑이 숨쉬는 그 맥박의 기다림이 나의 공간에서 쉼없이 뛰고 있기에 지금의 폭풍과 눈보라가 사라지길 기다릴 수 있는 것이고, 그 기다림 끝에서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
사람이 사는 지역을 없애버리거나 일정 지역으로 거주제한을 하고, 개경 부근으로 강제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해안 섬지역의 순찰도 강화하였다. 따라서 그렇게 자유스럽고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섬지역은 일시에 황량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진도 고려국이 낳은 후폭풍이었다. 몽골과 합방된 고려는 이후 강화도나 진도, 완도, 제주도, 남해 등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도록 아예 초기부터 봉쇄하고자 한 것이다.그러한 공도정책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특히나 고려 우왕 때의 왜구들의 대규모 침탈과 소탕작전이 전개되면서 섬 도서지
행복한 노화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대신 발견과 놀라움으로 채워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몸이 점점 쇠하면 마음은 거의 따라 순응하라고 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꿈을 꾸게 하고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 갑자기 내 앞에 놓여있는 아름다움을 보며 놀라움과 새로운 발견이 내 삶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것이 내 눈을 밝게 한다. 깊은 산속에서 피는 수많은 꽃이 꿈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꿈에서 얼마나 많은 꽃을 보았는지 색깔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어나면 단 몇 그루의 꽃만 기억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없는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세상의 추악함 마저 아름다움으로 아우르는 한없이 넓고도 한량없이 깊은 마음. 사랑의 끝까지, 미움의 끝까지, 아픔의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갈 데까지 가보아도, 누구도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사람.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나온 말이, 엄마라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부르셨다는 말도 엄마! 인간의 시작과 마지막이 엄마로, "엄마? 돈 줘!"하면 돈이 나오고, "엄마? 밥 줘!"
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수 없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
그 어떤 것에서도 강요받지 않고 혼자 스스로 사는 데에서 자아를 토해낼 욕망이 필요하다. 일엽편주의 망망대해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바람이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 복제가 가능한 식물일지라도 때가 되면 그에 맞는 주변 환경이 필요하다. 작은 부자는 성실함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가지면 가질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 많은 금은보화는 자기 것이 아니다. 낮은 사람과 함께 나눠 가지라는 하늘은 명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권력이 필요하다. 그 욕망으로 계획하면서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걱정말아요 그대/전인권 호기심 많았던 소년에게 바다는 오랫동안 헐벗고 굶주림의 땅이었다.소년의 영혼은 헐벗은 바다 위를 헤엄치며 자라났다.삶의 길을 거슬러 날개를 펄치며 어제의 슬픔에서 내일의 새로운 놀람으로 깨어났고 짙푸른 빛깔의 바닷물 위로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소년은 오랜 항로 끝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보았다
풀잎에 젖어 있는 이슬의 숨소리를 듣고, 초록 사이를 누비는 햇빛의 눈빛과 눈을 맞추며, 잘 말린 나뭇잎을 굴리는 바람의 심장과 교감한다.온몸으로 껴안는 숲의 뜨거운 심장 소리에, 바람의 혈관을 따라 산에는 생기로운 피가 돌고 바위는 쩍쩍 금이 가는 것이니, 만상에 물들어 버린 자연의 고요와 전율이 동거하는 자연의 시집 속 오솔길을 걸어 보라. 어느 새 대지의 기운이 온몸을 지피고 나면 온몸에선 소름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지난 주, 국내 미기종인 완도술꽃나무를 취재하던 중 오득실 전남산림자원연구소장과 몇 마디 나누다 전
봄은 가장 낮게 아주 작게 봄눈을 틔운다. 마음의 씨앗부터 작은 새싹까지 봄의 여정이 시작된다. 2월의 저녁 아침은 영하의 기온이다. 그리운 마음을 불쑥 내놓기가 그리 쉽지 않다. 추운 겨울에서 따뜻한 봄기운이 펼쳐지면 내 마음의 옷을 활짝 벗고 봄꽃 앞에 살며시 웃는다. 2년 동안 코로나 전염병으로 세계 동시대인들이 고통을 겪는다. 시대의 아픔이 전쟁으로 알았던 인류는 그 작은 것에서도 크나큰 시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발달한 문명의 아픔인지도 모른다. 물질문화는 지구촌 끝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인간의 모든
노비제도는 그야말로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신라라는 나라의 골품제도로서 굳혀지면서 고려와 조선까지 무려 1,500여년 동안 우리 모두를 옥죄는 간악한 제도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한 간악한 비인간적이고 인류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제도를 깨자는, 그러면서 실제로 깨뜨리고 나아가 주창했던 선도적인 지역이 완도였던 것이다. 송징장군의 이름이 완도에 많이 남아 있다. 송대장군이라고도 하고 또한 무(武)의 상징으로서 송징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의 이름이 황장소(黃腸所)였다고도 한다. 장보고 이후 완도에는 송대장군 즉 삼별초의
소남 김영현 선생이 81세 되던 해, 탐구열에 불타올라 노익장을 내세우며 우리의 고대사를 집필했다. 그가 완도에서 사회 계몽운동을 펼친 1920년대 우리나라 현실은 참혹하다 못해 비참한 일제강점기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일본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서와 모든 유적을 파괴했고, 전 국토에 산재한 유적을 도굴하여 찬란했던 우리의 문화유산을 모조리 강탈해 갔다. 독립운동을 했던 선각자들이 그랬듯, 우리의 역사를 보존 하려고 소남 선생은 우리의 고대사와 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했다. 그 결과물
완도와 해남을 오가며 늘 바라보던 숙승봉은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다. 상서로운 봉우리에서 강한 기운을 내뿜는 우뚝 솟은 저 바윗덩이가 내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청해진을 형성한 기운이 이곳에서 감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지난해 완도의 섬들을 탐방하며 느낀 것이 많다. 완도는 섬마다 독창적인 자원이 많다. 권역별 테마를 정할 만큼 무수한 자원을 그동안 탐사를 진행했던 완도의 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섬은 척박하고 문명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생각이 단번에
슬픈 눈매를 꾸욱 누르고 있는 바다는, 단 한 줄의 그리움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만 내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몰랐을 땐 바다를 알지 못했다. 그때의 바다는 잊어도 좋았다.하지만 시간 속으로, 삶 속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갈 때 그 삶은 쌓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려, 수평선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바다는 그리웠다.그것이 안음임으로, 당신의 그리움을 안아줄 바다, 2022년 스토리가 있는 완도바다.완도군은 국민 여행지가 된 청산도의 쉼과 풍부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는 청산도슬로걷
북향을 향하는 나그네가 된 사람이 있다. 추운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뜨거운 가슴을 파묻고 있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얼음장을 깨고 눈길 위에 발자국으로 정을 온전히 쏟아놓는 사람아. 네가 가는 길마다 푸른 새싹이 돋고 눈물의 꽃을 만드는 사람아. 남루한 세월을 지나왔어도 이마에 가장 깨끗한 햇빛이 내린다. 허름한 세월이 누더기가 되어도 밤하늘에서 별빛이 내리나니 그 사람이 나에겐 가장 소중하다. 남산 제비꽃이 오던 길로 다시 온다고 한다. 소녀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도 있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명나라를 넘어서 즉 중화를 넘어 당시의 조선이 독자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면도 있었다. 이충무공전서를 엮은 윤행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그래서 그는 정조임금과 함께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조참판으로서 정조대왕 묘지문에 기록했다.서얼이라도 적임자면 추려 쓰는 일, 노비(奴婢) 신분을 대를 물리지 않는 일, 조적 제도를 개혁하는 일 등을 차근차근 추진하고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묘지문에 밝힌대로 하려고 했던 일 중
DEAD LINE(데드라인). 사선(死線)사선에 선다는 건, 그 길에서 삶이냐 죽음이냐 2가지만 있다는 말이기도.사선에 놓인 두 가지의 길 중, 더 황량한 길을 가야 하고 더 비참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더 고립적이고 더 야성적이며 더한 고통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 들어가야 해서.그러지 않음, 마지막 종착역은 오지 않음으로...길의 끝에 이르면 알게 되는 건, 그 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문장이 너무 전율이라서 그 눈빛이 아니면 정말이지 죽을 만큼 먹먹해지는 거라서.사선에 선 눈빛이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만물이 똑같다. 찬서리에
완도수목원은 최근 상왕봉 일원에서 황금색 꽃망울을 터트린 복수초가 확인됐다고 26일 밝혔다. 복수초는 이른 봄 눈 속에서도 피는 꽃 중의 하나로,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이다.야생화 가운데 추운 겨울에도 먼저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꽃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야생화 가운데 추운 겨울에도 먼저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꽃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가장 빠른 1월 초에 꽃망울을 내밀었고 2010년엔 2월7일로 가장 늦게 개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