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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깃만 닿아도 찾아오는 내 마음의 평화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2.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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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화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대신 발견과 놀라움으로 채워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몸이 점점 쇠하면 마음은 거의 따라 순응하라고 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꿈을 꾸게 하고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 갑자기 내 앞에 놓여있는 아름다움을 보며 놀라움과 새로운 발견이 내 삶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것이 내 눈을 밝게 한다. 


깊은 산속에서 피는 수많은 꽃이 꿈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꿈에서 얼마나 많은 꽃을 보았는지 색깔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어나면 단 몇 그루의 꽃만 기억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아니,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그 앞날에 격분과 노여움이 꿈에서 폭발할 때가 많았다. 풋풋한 사랑의 꽃들이 꿈으로 나타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세월 가니 다 잊는다. 꿈은 다 잊으라고 꾸는 것일까.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요란스럽고 격정이 충만한 시절을 지나 이제 평화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다. 


벌레는 몇 번 변태하여 나방이 되지만 삶은 수천 번 껍질을 벗어야 마음이 순해지고 그에 따라 살면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이 쇠하고 마음은 그에 따라 순응하면 깊은 산속에 있는 꽃을 기다리게 된다. 


봄에 작은 꽃들은 마른 낙엽을 제치고 새순을 돋으며 꽃을 피운다. 구슬붕이, 흰 제비꽃, 보랏빛 현호색, 각시붓꽃, 산자고 등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다. 중의무릇도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의 연속은 강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움과 환희가 서로 교차하면서 타인의 삶을 배려하고 자기의 개성을 만들어 간다.

 

춘란과 산자고의 잎처럼 중의무릇도 같은 모양이다. 이들은 봄의 길목에서 아슬아슬하게 핀다. 가녀린 꽃대에 꽃을 피우고는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여 기울고 있는 중의무릇은 낙엽 사이에서 조용하게 올라온다. 한 개의 뿌리로 힘없는 꽃대를 올려놓은 마음이야 봄날에 꾸는 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핀다. 


한두 개의 꽃을 피울 때는 그나마 지탱하는 것 같으나 꽃을 모두 피울 때는 어김없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바람이 부는 대로 핀다. 봄빛도 그곳까지 부드럽게 만진다. 새로운 발견도 이미 있는 존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고 사는 것도 또한 잊어버린 것도 내 삶의 전체를 봤을 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 옷깃만 닿아도 장차 찾아올 평화가 크나큰 영향을 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냘픈 중의무릇 잎이 봄날을 주듯 내가 바라는 마음이 꽃이 될 수도 있다고. 수천 번의 물살이 내게로 밀려와도 단 하나의 그리움으로 남는다. 우린 이걸 간직하기 위해 잃어버린 꿈결에서 또다시 꿈을 꾸게 된다. 몸은 나날이 노쇠해 가지만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기 위해 산속에 외롭게 피어있는 꽃을 찾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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