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남도 어가소득 조사 결과, 연 소득 1억 원 이상 고소득이 2천501어가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1인 가구 증가 추세에 따라 가정간편식 개발 등 소비유형 맞춤 전략과 판로 차별화와 양식시설을 규모화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업종별로 전복 굴 꼬막 등 패류 양식이 721어가로 가장 많았고, 김 미역 등 해조류 양식 622어가, 굴비 등 가공 유통 483어가, 넙치 우럭 등 어류양식 293어가, 어선어업 237어가 순이었다.기후변화로 어획량 감소에 따른 어선어업의 고소득 어가 수는 다소 줄었으나 양식시설 현대화로
남도민주평화길을 걷는다.남도 어디를 가든지 풍전등화 백천간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구국의 의병들이 있다.‘사생취의(捨生取義)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다’. 의병들이 간직한 정신을 다시 새긴다.난망한 시국이다.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고, 민주와 평등이 흔들리고, 냉혹한 국제정세 앞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신뢰와 협력의 정신이 무너지니 국가 안위가 위태롭다.도대체 이 시국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시민들의 한숨소리가 아프다.남도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두륜산(700m)은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해남군의 명산이며 다도해해
장보고기념관이 새 단장을 마치고 지난달 16일부터 시범 운영 후, 9월 1일 정식 개관했다. 기념관은 해상 무역 왕 장보고의 업적과 해양 개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8년 개관했으나, 내부시설 노후화로 국비 26억 원을 들여 지난 2021년 전시 콘텐츠 개편과 시설 개선 사업을 추진했다.이번에 재개관한 장보고기념관은 2층 구조인데, 1층에는 동아시아 바다를 누빈 장보고 상단의 무역선을 복원해 거센 파도를 항해하는 정신을 표현했다. 2층은 장보고와 관련된 지도, 바다, 적산법화원, 무역, 도전 정신 등을 주제로 미디어아트를 선
요즘사람들은 복잡한 생활패턴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갖기 원한다. 그래서인지 여유가 생기면 공원, 강변, 숲속, 해변 등을 거닐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여름의 끝자락, 바닷가 산책이 조금 누그러질 때는 잠시 산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숲속을 거닐면서 숲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과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이 산림욕장이다. 이름난 산이 있는 주변에 주로 갖춰져 있는 게 보통이지만, 섬 중에 산림욕장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섰다.고금도 덕암산 꽃누리 생태공원이다. 오래전 완도군이 시행한 사업인데, 생태공원 숲길
″오매매 사진 찍는 줄 알었으먼 머리에 물이라도 조깐 무치고 올것인디″제주도 성산읍 시흥리가 고향인 김영숙 해녀는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화장을 안했다며 멋쩍은 표정.″내가 스물두 살 때 고향 친구가 육지에 물질을 가자고 꼬시는 거여, 그때 수영을 할 줄 알아도 남들처럼 잘하지 못했거든. 물질을 하는 건 많이 봤어도 물질하는 기술은 없었고 거기에 수영도 잘 못함서 겁도 없이 친구를 따라 나섰어“이렇게 시작된 김 해녀의 물질은 오늘날까지 47년을 이어지고 있다. 첫 원정 물질은 완도의 대모도(大茅島)로 왔다고.″처음 모도로 와서 갓
완도군은 7개의 천연기념물을 보유했다. 완도읍 주도 상록수림(제28호), 보길도 예송리 상록수림(제40호), 예작도 감탕나무(제338호), 소안도 미라리 상록수림(제339호), 맹선리 상록수림(제340호), 군외면 대문리 모감주나무군락(제428호), 보길면 정자리 황칠나무(제479호), 이 중 3개는 보길도에 있다. 예송리 상록수림과 정자리 황칠나무, 예작도 감탕나무가 그것이다.지금은 아쉽게도 예작도 감탕나무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된 상태다.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살아온 이 나무는 민속, 생물학적 자료의 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
태극기의 물결이 찬란하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대한, 민국, 만세호를 타고 소안도에 가면 집집마다 내걸린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8월이다.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답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내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는 다양한 종류의 태극기가 걸려있다. 여러 문양의 태극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는 조선통신사에 의해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뚝딱! 만들어졌다고 배운 적 있다. 제아무리 국권을 잃었다지만 국가의 상징을 어찌 그렇게 쉽게 만든단 말인가? 국기로서의 논쟁거리도 많다.
7년 전쟁을 모두 승리한 장수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순신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설들이 많다. 이순신의 삶 중에 7년 넘게 끌었던 임진왜란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끝났다. 그의 극적인 최후 때문에 자살 의도설이나 사망 위장 후 은둔설 등 여러 낭설이 퍼졌다. 이순신의 자살 의도설은 행장에 면주(免胄, 투구를 벗다)라는 표현 하나 때문에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퇴마록으로 판타지의 지평을 연 이우혁이 왜란종결자에서 이순신의 '사망 위장 후 은둔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이순신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고
묘당도는 언제 생겨난 지명일까? 노량해전 당시 고금도진에 월송대는 존재했을까?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여 고금도 월송대에 80여 일 동안 유해가 안치되었다는데, 그것은 사실일까? 완도군이 역사적 고증을 통해 정유재란 당시 고금도의 상황을 재정비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했다. ‘완도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과 통제사 이순신’ 학술행사가 지난 14일 고금면사무소에서 개최됐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시기인 1598년 2월 17일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7월 16일 진린과 명나라 수군과 최초로 조명 연합수군을 결성했다.이순신의
서도(瑞島). 상서로운 섬이다. 게다가 아름다움까지 더하니 여서(麗瑞)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신성한 땅 여서도 이름표에 어느 누가 ‘고려시대의 화산섬’이라는 누명을 덧씌웠을까. 완도군지 여서도의 유래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고려 목종 10년, 탐라 근해에 일주일 동안 대지진이 발생한다. 천지가 진동하고 지축이 뒤틀리면서 화산이 폭발하더니, 이내 바닷속에서 큰 산 하나가 불쑥 솟아난다. 완도군 최남단 청산면 남쪽의 여서도에 가면 마치 정설처럼 붙여진 이야기다.이와 흡사한 내용이 제주도에도 있다. 지역의 관광자료에 근거해서
완도바다 넓이는 얼마나 될까? 관할권 안에 섬들은 몇 개나 될까? 완도는 우리나라 서남단 여러 섬으로 이루어졌다. 2001년 조사로는 유·무인도 합이 201개, 근거 자료가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2018년 조사 내용으로는 여를 포함한 섬이 무려 265개로 알려졌다.광활한 바다 근해의 깊이는 10~30m 정도, 먼바다는 수심 150m에 불과한 완도는 그야말로 바다 속 대평야지대. 김, 미역, 톳, 다시마 등 해조류 양식과 섬마다 자연자원이 풍부한 난대림의 보고이자 어패류의 자연생산과 가두리 어장을 갖춘 천혜의 바다이다. 게다가 전국
험난한 바다를 표류하던 옛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흥미롭다. 서로의 문화가 다른 곳을 계획 없이 떠돌면서 새로운 문물과 맞닥뜨리며 낯선 이국 풍습을 경험한 이들의 무용담을 읽어 내려갈 때 흥미진진함이란. 네덜란드인 하멜에 관한 이야기는 하멜표류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리 지역에서도 바다를 표류한 모험담이 있어 지역 인문학 강의에서 자주 등장하곤 한다. 해남지역 금남 최부의 표해록, 신안지역 홍어 장수 문순득, 제주의 장한철과 김대황, 조선의 4대 표류기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추자도 인근의 완도바다에서 표류한 장한철 이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이지만, 가슴 안에는 사는 것이 있다. 그걸 말하고 사는 존재가 사람인데, 어떠한 것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또 어떠한 것들은 가슴 안에 움으로 박혀 있는 것이 있다.기이한 게 그 움이란 말로 꺼낼 수가 없다. 카악하고 뱉어버리면 될 것 같은데도 나올 수 없는 것.그때 쓰는 것이 시(詩). 아니면 그리든가 그러면 그림이 되고. 그도 아니면 부른다. 그러면 노래다.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한다. 시인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고귀한 메시지를 전달
현악기 비파(琵琶)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비파(枇杷). 6월의 황금빛 열매가 그윽한 향기로 우리를 유혹한다.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에 들지 않았어도 군자가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수묵화에 종종 등장하는 나무. 거뭇한 수묵바탕에 샛노란 열매의 색채가 은은하게 퍼져 퍽 인상 깊게 느꼈던 때가 있었다.남송시대 화원 임춘은 화조도로 일반에 알려졌는데, 그의 비파산조도와 비파수우도가 비파 그림의 대표작이다. 사군자를 그리는 화원들에 의해 비파나 포도, 복숭아 같은 과일 그림이 활발하게 그려질 즈음, 초충도와 화조도가 함께 전해지면서
군사정권 때 청와대는 이순신 성역화 사업을 진행했다. 관계자들은 임진왜란 격전지를 돌며 전국을 순회하면서 그 지역 토속음식도 찾았다. 완도군에 와서는 자연산 약초를 먹고 자란 흑염소를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청와대 비서진들은 흑염소 보양식을 대통령에게 급히 올렸다. 그러면서 약산도가 건강의 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자연산 비아그라로 불리는 삼지구엽초를 먹고 자란 흑염소는 전국 최고의 명물로 급부상했다. 약산도는 원래 명칭이 조약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조약도가 처음 등장한다. 129종의 약초가 자생하고 맥문동과 음
산들이 둘러 쳐 바다 소리 들리지 않아, 맑고 소쇄하여 부용동(芙蓉洞)이요, 격자봉 아래 집짓고 여생을 마칠 곳 삼아 낙서재(樂書齋)라.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문학가다. 해남의 금쇄동에서 산중신곡을 지어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한 오우가,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은 어부사시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국문학사에 빛난 작품들이다. 그 작품 속에는 각별한 자연애가 느껴진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때 인물로 어린 시절 임진왜란을 겪는 등 조선 최대의 격동기를 보냈다. 당쟁과 반정, 임진왜
″시집을 왔는데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친정이 죽굴도인 정앵자 씨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50년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하기 전 살았던 죽굴도는 겨우 몇 가구가 살아가는 전형적인 낙도. 정기 여객선인 새마을호(현, 도서낙도보조항로)도 손님이 있어야만 기항을 하였다.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의 중매로 섬에서 섬으로 시집을 왔으니 여러가지로 낮설고 힘들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어요, 신랑이 찾아와서 딱 한 번 보고 시집을 오게 됐지요″ 모든 것이 물설고 낮설었지만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고 한다. 스무살에는 살림밑천이
"손, 한 번 잡아주실래요?"이 밤을 아름답게 흔들고 있는 바람의 문장이 손 내밀며 안개처럼 젖어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언제나 곁에 있어요""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모든 숨구멍을 찬란함으로 물들였던 당신의 그 시간 속에서"속삭임을 듣자 "당신의 손을 잡았어요" "이제, 이 밤을 어떻게 번져갈까요? 어떻게 물들어가면 되죠?" 날개를 잃고 떠돌던 바람의 영혼이 경련의 단락을 바꿔 영혼의 어휘들을 마음껏 휘날리는 우리의 라인댄스로!이 밤, 암수 한 몸의 비익조를 타고서 장엄한 밤바다와 기이한 솔밭 숲을 유유하게 날으며 무아한 진동으로 무
골똘히 등잔불 밝혀, 골똘히 등잔불 손짓바람으로 꺼긴 밤 풀벌레소리에 잠겨 안공부 하다가 어느 해부터바깥공부에 눈떠 영국 제너 종두법 익혀 처가 동네사람들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임오군란 때 우두 놓는 법 배워왔다고 잡혀갈 뻔하였다. 양도깨비 되었다고 수군거리고 우두는 독침이라고 내몰리는 동안 전주에 우두국 설치 공주에 우두국 설치아이들에게 우두를 놓았다.그 뒤로 천연두로 죽는 아이 싹 없어졌다.유배지 섬에서도 우두였다.해배의 몸, 뭍으로 돌아와서도 오로지 우두였다.그러다가 우두의 삶 쉬고 주시경과 함께 국문 쓰기 제창 국문 가로쓰기
끝을 가보기 전에는 그게 무엇이었는 지를, 끝에 가게 됐을 때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명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그 아무 것도 아닌 게 모든 것이거나. 다만 무엇이 끝을 가게 하는 힘인지 그것이 중요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인사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무원 근평 문제로 징역형을 받게 된 박철환 전 해남군수. 그가 재임시절 모 신문의 데스크로 재직 중이었는데, 그의 인사 중 가장 빛났던 인사는 면 단위에 근무하던 6급 여성 공무원을 군청 요직에 앉히지지도 않고서 면장으로 승진시킨 파격 인사였다. 질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