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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는 사람

완도를 희망하는 사람들 ⑨ 김성태 씨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4.12.17 22:25
  • 수정 2015.11.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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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아침, 완도금일수협 활선어공판장에서 선어를 분류하고 있는 할머니를 김성태 원장이 옆에서 돕고 있다.


추위가 매섭던 12월 16일, 오전 8시 경 하늘에서 우박 같은 눈송이가 간간이 흩날린다. 수협 활선어공판장이 몹시 혼잡스럽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사불란하게 분주하다.

 

그 가운데 모자 쓰고 마스크를 낀 채 눈만 빼꼼히 내놓고 바삐 움직이는 이가 있다. 수레에 빈 궤짝을 싣고 어디론가 옮기더니, 선어 선별하는 할머니 곁에서 버려진 줄돔과 얼음조각들을 모아 수레에 싣기를 반복한다.

망남리 광주일보 채널A 연수원(전 대주건설 연수원)에 근무하는 김성태(50) 원장이 매일 아침마다 반복하는 일상이다. 배에서 활어를 내려 수레에 싣고 공판장으로 옮기는 일이며, 차에서 생선 궤짝을 내리는 일, 빈 콘테이너를 옮겨 싣는 일, 물고기 선별을 돕는 등 어부들의 허드렛일을 거들어 주고 그 댓가로 생선을 받는다.

완도에서 모두가 아는 용칠이 아저씨하고 같은 일이다. 다르다면 용칠이 아저씨는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이라면, 김 원장은 인근 노인요양원에 기탁하는 남을 위한 봉사활동이다. 13년 째 묵묵히 해오고 있다.

그가 특별하게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게 된 계기는 어려서 겪은 아픈 기억에서 비롯된다. 이웃 장흥 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려서 동생을 잃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 고아원에서 근무하는 이모부를 따라 강진 자비원에 갔을 때 비로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비원 아이들과 놀아주고 이를 잡아주며 씻겨주는 일을 거들었다. 그의 평생 봉사활동의 시작이다.

김 원장은 '헌혈맨'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성남으로 가면서 시작한 헌혈은 매달 두 차례씩 일년에 24~25회에 이를 정도다. 그렇게 30여년을 이어왔다.

요즘 들어 감기에 걸리면서 그의 아내가 간혹 "헌혈을 적당히 하라"면서 말린다고 했다. 또한, 그의 몸에는 두 개의 수술 자국이 남아 있다. 하나는 1995년에 간을 기증했을 때 자국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 신장을 기증했을 때 자국이다. 두 번 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기를 조건 없이 떼어줬다.

김 원장은 요양원에서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의 말벗이 되면 충분한데 요즘 아이들은 봉사 점수를 받기 위해 시간 때우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봉사가 뭔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하면서 요즘 아이들의 세태를 걱정했다.

그런 그도 자신에게는 매우 인색하다. 헌혈하기 위해 광주까지 다니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픈 관절 수술을 하지 못해 아침마다 활선어공판장에서 절뚝거리며 리아카를 끌고 있다.

매일 자신의 아침 시간을 쪼개 어민들의 짐을 덜고,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이웃의 목숨을 살렸던 김 원장에게 세상은 많은 상으로 보답했다. 지난 9일, 2014 전라남도 자원봉사자 대축제에서 그는 자원봉사상 감사패를 수상했다.

2015년은 완도에 그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25일 성탄의 메시지도 결국 자신의 것을 내놓고 나누는 봉사 아니겠는가. 

 

▲ 광주일보 채널A 김성태 원장(망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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