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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큰 문화 관광자원 숙승봉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3.02 09:15
  • 수정 2015.11.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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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문화원 김재규 부원장

 

동부선 국도를 따라 군외면 영풍리를 거쳐 불목리에 다다를 즈음 첫눈에 마주치는 높다란 바위산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인자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우리네를 사랑스레 내려다보는 산. 왠지 모를 신비로움과 호기심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산. 이 산이 바로 숙승봉 이다.

 

숙승봉이란 이름은 중이 앉아 명상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잘 숙(宿)자. 중 승(僧)자를 합쳐 숙승봉이라 전해지고 있다. 숙승봉(높이435m)은 우리 군에서 상황봉. 백운봉. 업진 봉에 이어 4번째 큰 산봉우리이다. 먼저 이글은 우리 군의 아버지 격 상징성이 있는 상황봉과 그 외의 다른 산에서는 언급하지 않음을 그리 알기 바란다.

 

숙승봉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 군의 여러 산 중에서 유일하게 전설과 역사가 서려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또 우리 군의 관문인 군외면 불목리 “해신” 세트장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계적인 규모의 완도 수목원이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이를 연계한 숙승봉은 미래에 큰 문화관광 자원으로 보존과 개발 가치가 큰 산이란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군민 정서에도 큰 비중을 점하고 있다. 특히 군외면 동부에 속한 마을 주민들은 숙승봉 줄기의 물을 먹고 농사를 지으며. 땔감을 얻어 살아왔으며. 산을 통한 자연교육을 받는 등 젖줄과 같은 혜택을 입고 살아와 정서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이다.

 

1. 숙승봉의 규모와 45년 전의 모습

 

이곳은 전라남도 도유림에 속한다. 봉우리 전체가 암벽(절벽)으로 되어있고 추정면적 지름 200m. 높이 200m. 둘레는 약 1km 정도이다. 정상에는 원추리나물(난초과에 속함)이 많이 자생하여 봄철에는 나물 캐려는 부녀자들이 많이 오르기도 하였다. 또 한약재와 고급요리에 쓰이는 석이버섯은 숙승봉 절벽에서만 자생하고 있어 이를 따고자 각처에서 장정들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일전에 밧줄을 걸고 절벽을 타고 내려가 버섯을 채취하다 줄이 끓어져 낭떠러지로 떨어지던 중 나무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암벽 중간 중간 틈새엔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도 모질게 자란 나무들과 주변의 아름드리 상록수와 소사목 등 자연림으로 어우러져 지금의 황량한 숙승봉 형태와 달리 수려한 아름다운 산의 모습이었다.

 

또 정상에 오르면 완도 바다와 해남 두륜산. 장흥 천관산에 이르기까지 그림 같은 정경을 조망할 수 있다. 높고 푸른 산골짜기 물이 숙승봉 건너편에 솟은 하상봉 중간을 가로질러 “해신” 세트장 곁으로 흐른다. 불목 천으로 합해지는 하천(잔고랑)의 물이 유리같이 맑고 시원하기로 유명했는데 하천 중간에는 용소(용 둠벙 이라함)가 있다. 용소에는 용이 지나간 자욱이 연못 바닥 암반에 하얀 띠로 지름30m 길이 약 40m 가량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야기 1. 숙승봉에 서린 역사와 전설.

 

본 이야기는 필자의 부친과 군외면 원로들에게 전해 들음.

 

숙승봉 하단부 절벽 (위로70m 지점)에 앞 산에서도 건너다보일 정도의 지름 10m 정도로 무섭게 휭 뚫린 굴(큰 굴이라 하며 접근을 할 수 없음)이 있다. 예날 예적에 이 동굴에는 유명한 스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막신을 신고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리면서 살았다. 굴속에는 샘이 하나 있어 끼니마다 한 사람분의 쌀과 물이 샘에서 나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육지 절에서 귀한 친구 스님 두 분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했으나 여느 때와 같이 1명분의 식량과 물만 나오므로 조금 더 나오기를 바랄 요량으로 지팡이 끝으로 생 구멍을 쑤셨더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뜨물만 뚝뚝 떨어지더니 영원히 멈춰 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나 호기심 많은 사람이 밧줄을 내려 굴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대단히 큰 도가니가 하나 놓여있고 그 안에 온갖 책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 책들을 살펴보려고 가까이 갔더니 사람 몸집보다 더 큰 지네 한 마리가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노려보더라는 것이다. 들어갔던 사람은 기겁하고 죽을 지경이 되어 겨우 돌아왔다고 전한다.

 

이야기 2.

 

숙승봉 밑에서 정상으로 암벽 90m 지점. 정상에서 아래로 50m 지점에 뚫린 동굴(작은 동굴이라 함) 이 있다. 이곳에 송림대사 혹은 앙살래 중(성명 미상 석장리 오씨라고 만 전해짐) 이 영험이 있고 경치가 수려한 이곳 숙승봉을 찾아왔다. 작은 동굴에 들어가 바닥에 구들장을 깔고 살았으며. 나막신을 신고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왕래하였다.

 

이곳 경치에 도취하여 지었다는 한시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두상 구만 공 안전 백만 개 頭上 九萬 空 眼前 百萬 開”로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니 구만 척의 높이요. 앞을 바라보니 백만 마지기의 들이로다.) 구들장 등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야기 3.

 

“신선놀음 구경하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는 지방속담이 있다. 숙승봉 바로 아래에 살던 노총각이 하루는 나무하러 숙승봉 큰 산에 들어서니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들려와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자꾸 올라갔더니 숙승봉 기슭이었다. 아름다운 정자 아래서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잘 생긴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향기로운 잔을 서로 권하면서 노총각을 보더니 이리 오라 하면서 빙긋이 웃음 짓는 모습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함께 잔을 들면서 두 사람의 바둑 내기를 구경하는데 아슬아슬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다른 세상일은 까마득히 있었다. 한참 후 자!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만나 담판을 하세! 그럼 그러세! 하고 두 사람이 일어서는 순간 노총각의 발 앞에 뭔가가 떨어졌다.

 

이게 웬일인가? 나무지게 위에서 새로 갈아 끼웠던 도끼자루가 썩어 도끼날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 순간 두 사람과 정자. 바둑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혼자만 서 있었던 것이다. 더 기막힌 일은 마을로 내려오니 전혀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80세가 넘은 늙은이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 중 한 사람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친척 조카가 아닌가.

 

그러나 자기는 나이 20세 중반의 총각 그대로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총각은 잠깐 찰나에 100 년 세월이 흘러버린 것을 알고 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의 은선동이란 마을 이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제법 걸맞은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2. 아쉬움으로 남은 기억들

 

앞서 숙승봉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였듯이 지난날의 모습은 현재의 모양과 달리 암벽 중간 바위틈에서 수백 년 동안 자란 나무들로 기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산봉우리 밑 산등성과 계곡 쪽으로도 수령이 수 백 년 된 서어나무. 박달나무. 붉 가시나무 등이 고목상태의 윈시림으로 무수히 들어차 있었고 큰 나무는 장정 3~4명이 보듬을 정도였다.

           
 

약 45년 전 심한 가뭄이 든 해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예부터 전해내려 온 일종의 기우제 성격의 풍습이 남아있었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높은 산꼭대기에다 불을 피우는데(일명 봉불) 마을 대표들이 모여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하여 거행하였다. 주로 상황봉. 백운봉. 업진봉. 숙승봉 등 높은 산이 대상이었다.

 

봉불을 피우는 방법은 산에 가까운 마을 장정들이 미리 나무와 풀을 준비해 두었다가 오후 6시부터 7시 사이 땅거미가 질 무렵 불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각 봉우리에서 봉불이 타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그 시절 마을 간에 이 위험한 일을 어떻게 아무런 반대 없이 합의를 이루었으며. 또한. 일사불란하게 봉불을 피웠는지 지금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불행은 숙승봉에서 발생했다. 그때 숙승봉에서 불씨가 벼랑에 날아가 봉우리 중간 중간 나무숲에 불길이 붙고 곧이어 전체로 번져나가 며칠간이나 계속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동네 사람들이 올라가 불을 끄려 했으나 불가능 하였으며. 모든 나무들이 잿더미가 되고 황량한 바위산만 남고 말았다.

 

아름답기가 스위스의 산보다 승하였던 과거의 숙승봉의 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같은 진화인력과 헬기 등 현대적 장비가 동원되었더라면 불행을 막을 수 있었으련만또한. 숙승봉 주변 계곡 쪽으로 무수히 들어찼던 원시림도 사라져갔다.

 

주민들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거두(큰톱)를 들고 가 온 종일 번갈아가며. 나무들을 쓰려 뜨려 장작으로 쪼개고...시대가 변하여 주민의 연료가 나무를 때던 시절을 지나 연탄과 기름보일러로 바뀌었고 환경생태보전의 중요성을 깨우쳐 애림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미 홉 한 대로 다시 숙승봉의 예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 모습으로 복원하기까지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아직 있지만 최근 들어 숙승봉의 아름다운 모습을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희망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3. 맺는 말

 

새 시대에 돌입하여 하늘의 뜻이리라. 1200년 전 찬란하던 청해진 장보고 시대를 꿈꾸어 온 우리에게 “해신” 방영으로 완도가 유명해지고 아울러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는 숙승봉도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 산에 대한 가치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 숙승봉 길목마다 각 단체의 산악인과 등산객이 찾아드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산을 보호하고 관리하려는 흔적과 나뭇가지에 매달린 애정 담긴 리본을 보고 또 다른 감동이 스며든다. 국도 제13호선 확. 포장 등 도로의 발달 또한. 가치상승의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환경과 발달이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관광문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차후의 바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군에서는 불목리 “헤신” 세트장과 세계적인 완도수목원을 연계하여 환경에 알맞는 공존공생의 숙승봉 개발에 힘써 주실 것을 거듭 부탁드리며. 아울러 온 국민께서도 숙승봉을 비롯한 모든 산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여 미래의 자산으로 가꾸어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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