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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환두대도 어디로 사라졌나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4.03.28 15:31
  • 수정 2024.04.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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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에는 고분이 하나 있다. 신라시대 장보고 대사의 수하 장수인  한내구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하여 그곳에 있는 당집에서 한장군을 기리며 당제를 모셔왔다. 청산면 당리 고분 앞에 지어진 당집은 이곳 주민들이 한장군의 사당처럼 여겼다. 


그런데, 고분 개석이 노출되는 등 훼손이 진행되어 긴급수습조사 목적의 정밀발굴조사를 했다. 지난해 5월부터 8월초까지 2개월 반 가량 호남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시행한 것. 고분의 축조시기와 구조, 성격 등을 밝히고 유적보호에 필요한 대책 마련의 목적이었다.


고분 정상부는 훼손되어 판석재의 개석 2매가 노출되어 있었고, 개석 일부는 도굴과정에서 2조각으로 갈라져 파괴된 것으로 확인됐다. 당리고분이 학계에 보고된 것은 지난 1995년으로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발간한 완도군의 문화유적에 처음 소개됐다. 2007년에는 동신대학교박물관에서 진행한 완도군 문화유적분포지도에 수록되었는가하면, 2010년 발간한 완도군지에는 당리고분에서 철검자루와 삼각투창 고배, 엽전, 도자기 등이 나왔다며 주민들의 말을 인용해 기록했다. 

 

최고 권력자가 소유한 환두대도의 문양으로 추정하며,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칼에서 나온 용봉문양이다.
최고 권력자가 소유한 환두대도의 문양으로 추정하며,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칼에서 나온 용봉문양이다.

 

당리고분 발굴 조사결과 석곽내부에서 120센티미터의 대형 철검인 목병도를 비롯해, 철부, 화살촉, 철겸, 대롱모양의 토제품 1점 등 다수의 금속유물이 석곽 중앙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이미 도굴이 진행되었기에 토기류 등의 매납 사실은 밝혀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청산면 당리고분은 수혈식석곽이 매장시설로 축조된 직경 13미터의 원형으로, 출토된 유물로 추정하여 5세기 중엽의 이 지역 수장급 무덤으로 학계는 보고했다. 매장시설 벽석의 축조기술과 주변의 적석보강, 분구성토가 함께 이루어진 모양으로 보아 영산강내륙의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과 같은 유형이었다.  

 

 

비슷한 시기, 완도군 고금면 인근의 해남군 북일면 고분 발굴과정에서도 철제도검이 나왔다. 말로만 듣던 환두대도였다. 왕이 신임하는 장수에게 하사한 환두대도가 이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마한시대 수장의 무덤이 북일 방산리 독수리봉 정상에서 발견된 것도 특이했다.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한 고분 주변에는 다른 고분이 분포돼 있었다. 해남 북일면에서 발견된 고분에서는 옹관이 아닌 나무로 만든 관을 이용한 것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청산면 당리고분의 유적발굴조사 결과 석관 바닥은 자갈돌을 깔고 시상대를 고르게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데, 목관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남 지역의 여러 고분 축조과정을 학계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한 결과 고흥 안동고분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지석묘(고인돌) 유적을 형성했던 토착세력으로부터 이어져 축조한 것으로 보고했는데, 청산면 당리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 일대의 읍리 지석묘군 유적으로 대변되는 토착세력으로부터 이어져 축조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리고분이 위치한 청산도는 고흥, 완도, 해남의 연안해로와 여서도, 제주도와 거문도, 일본 구주지역으로 통하는 먼 바다의 경계지점이다. 청산면 당리고분 발굴조사를 통해 기원 후 5세기~6세기 마한시대 한반도와 왜계의 해양교통로 교두보 역할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학계는 발표했다.  


장보고의 해상교역로에서 중요한 지점으로 파악하며 장보고 수하의 장수 무덤으로 여겨온 고분은 결국 이 지역 토착세력이 발전하여 형성된 집단의 유력자 무덤인 마한시대 유적으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서기 851년 2월, 신라 조정에서는 청해진을 혁파하고 주민들을 벽골제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따라 완도에는 그 어디에서도 청해진 이후의 장보고와 관련한 흔적 찾기가 어렵다며 장보고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역적으로 몰려 염장에게 살해당한 장보고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주장하는 그것처럼 장보고의 시신을 영영 찾지 못하게 하려고 목을 베어 깊은 바다에 수장해 버렸던 것일까?


전 세계 고대해양사의 한 획을 그은 장보고, 공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의 모습처럼 그는 항상 지휘봉을 지니고 다녔을까? 아니면 장수의 위용을 드러내며 금장을 두른 환두대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장보고의 환두대도는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던 환두대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의장용으로 사용한 듯 칼의 고리가 위쪽으로 향하게 하여 정중히 짚고 있거나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 모양처럼 보이는 문양이다. 환두대도의 모양 중 알파벳 C자를 3개 붙여놓은 모양은 대부분이 신라에서 나왔다고 한다. 용과 봉황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모양도 있다. 백제 무령왕릉 발굴 때 왕의 왼쪽 허리춤에서 발견한 대도의 문양이다.

 

문양 분류는 신라시대를 기준으로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백제, 고구려, 가야에서는 상징 계급의 기준이 일부 다를 수도 있다고 한다. 그 중 삼엽문 환두대도는 고분유적에서 골고루 발견되지만, 특히 가야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됐다고. 삼엽문은 그 모양이 식물의 이파리처럼 생겨서 명명했을 뿐, 그것을 형상화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우리의 삼국시대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의 여러 가지 문양 특징을 가미한 금속공예품에서 보면, 이것은 당대의 디자인적 유행으로 구분하기도.


신라 중앙정부는 지방의 수장들을 포섭하여 그들을 지배하려고 여러 가지 무늬를 장식한 환두대도를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에게 계급별로 하사했다. 지방의 수장들은 그것을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면 장보고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장수의 환두대도는 어떤 문양이었을까?

 

마한문화연구원이 진행한 독수리봉 발굴조사 결과 토착세력인 마한소국 수장의 무덤에선 아라가야 계통의 토기와 한강유역과 충청지역에서 보이는 무덤 봉토에 할석을 이용한 축조방식이 확인됐다. 이로써 무덤의 축조집단이 해로를 관장하며 주변 집단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성장한 세력이었음을 짐작한다.  환두대도를 휘두르며 바다를 터전으로 누볐던 막강한 해상세력,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꿈꿨던 위용은 고스란히 무덤으로 남겨졌다. 


해남의 북일면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완도군 고금면에는 고인돌공원이 있다. 도로공사 중에 발견한 고인돌을 한데모아 공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선사유적과 관련한 더 이상의 연구가 이곳에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고대해양사를 바라보는 이 지역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인근 지자체의 고대유적 발굴실적에 비춰볼 때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지역 사람들의 안목과 수준을 짐작케 한다.  


한편, 장보고의 탄생배경과 죽음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완도 사람들은 청해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지역 내에 어떤 유적을 보더라도 그것을 장보고시대와 연결지어보려는 성향이 강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보고의 유적을 하나라도 더 발굴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지역 향토사에 관심 갖는 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다. 그 열정에 큰 박수와 응원은 보내지만, 그것이 장보고를 대하는 막연한 경외감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마한문화권 형성을 위해 마한시대 유적 발굴로 전남의 각 지자체가 술렁이고 있다. 그들은 “장보고시대보다 훨씬 이전의 막강한 해상세력이 자기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며 청해진의 고대해양사를 겨냥해 활 시위를 당기고 있다.

 

완도의 모든 섬들에는 선사시대 인류가 정착했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막강한 해상세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곳곳에 널려있던 선사시대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다. 오로지 청해진의 역사 외엔 관심 밖의 일로 치부했다. 지금, 완도군의 선사시대 인류의 활동상과 고대해양사가 재조명 받지 못한다면 완도군을 상징하는 청해진의 역사도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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