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박물관은 왜, 조선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열광했나

새로운 세상을 위한 염원 '연려실기술'에 담아
부친의 글 새긴 편액, 240년 만의 극적인 만남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4.03.08 10:15
  • 수정 2024.04.01 21:48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교 이광사가 첫째 아들 긍익에게 내려준 연려실이라는 글씨를 그대로 판각한 편액. 
원교 이광사가 첫째 아들 긍익에게 내려준 연려실이라는 글씨를 그대로 판각한 편액. 

 

지난 2022년 전주국립박물관이 일반 미술품 경매에 나온 동국진체와 유사한 작품을 구입했다. 그것은 원교 이광사가 그의 아들에게 써준 글씨를 판각한 ‘연려실(燃藜室)’이라는 편액이었다.


그해, 대구국립박물관이 조선시대 편액 전시를 기획하면서 전주국립박물관이 사들인 편액을 제 1호 전시품으로 일반에 선보였다. '240년 전 부자지간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의미를 붙이면서 모든 관심이 거기에 집중했다.

 

편액을 발견한 과정은 지난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전국에서 수집된 유물을 정리하는 중에 발생했다. 그동안 존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박물관 측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에서 수습한 뒤, 여러 경로를 거쳐 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던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아들이 유향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친은 호를 긍익에게 내렸다. 그것이 연려실이다. 그가 집필한 조선의 야사 '연려실기술'은 당대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통로였다.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서 역사를 연구하는 곳’이란 뜻의 연려실은 중국 한나라 유향이라는 학자가 밤새 명아주 줄기를 태워 빛을 밝히며 역사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고사를 품고 있다.


긍익은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면서 역사 기록을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는 저서에 조선 태조부터 숙종 때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임금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열려실기술은 왕조의 기록보다도 더 자세한 내용을 수록했다. 승자의 역사가 아닌, 각종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나열해서 한 눈에 우리의 역사를 볼 수 있게 서술했다는 점이 컴퓨터가 없는 당대로선 큰 화젯거리였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기록, 처음과 끝의 본말이라고 해서 ‘기사본말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을 쓰지만, 이것은 일기를 쓰듯 날짜별로 서술한 편년체의 기록과는 다르게 카드섹션과 같은 편리성을 응용한, 현대식 방법과 유사한 기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긍익은 당대의 언론인을 자처한 셈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다가 자칫 상대로부터 다른 평가가 이뤄진다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른 긍익의 생각은 이랬다. “처음 이 책을 만들 때 가까운 친구들이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한 일이 간혹 있었다. 나는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 놓고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했다. 그의 강한 의지가 담긴 조선의 야사는 마치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권위 있는 역사책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는 또,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를 모아 분류하여, 편집 하나도 나의 사적 견해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것이다”라고 새겼다. 정사가 아닌 민간에 떠도는 야사에 이르기까지 긍익은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설득력 있게 한데모아 집필했던 것이다. 


일반 역사서에는 글쓴이의 논평이 들어가지만, 그는 철저히 시대의 기록자로 역사에 남기를 원했다. 연려실기술에 가끔 틀린 내용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실증적인 역사서와 함께 읽는다면 조선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완벽한 책이라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그 책속의 이야기 몇 개를 보면,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서 은거할 때 일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 부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는데, 심부름 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함흥차사’의 고사라던가, 신숙주가 궐에서 밤늦게까지 업무를 보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이를 측은하게 여긴 세종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는 이야기, 신숙주의 부인이야기, 수염이 아름답고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는 문종이야기, 노비의 자식들에게 까지 관용을 베푼 황희 정승의 이야기 등 드라마나 영화에서 제작된 조선시대 이야기는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고.


1995년 조선왕조실록이 CD로 제작되고, 2005년 인터넷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야사의 기록인 연려실기술의 내용이 교과서 역할을 했을 만큼 중요하게 다뤘다.  

 

신지도로 유배 온 원교 이광사의 유일한 희망은 두 아들 긍익과 영익이었다. 둘째 아들인 영익은 부친을 따라서 유배지로 내려와 조선의 양명학을 완성했다. 첫째 아들 긍익은 한양에서 근근이 집안일을 돌보면서 부친과 서신을 나누고 유배지를 오가면서 부자의 정을 이어나갔다. 


전주와 대구, 양대 국립박물관이 선택한 원교의 친필과 편액을 보면 관람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선사했을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편액전시 중 최대 관심사는 부자지간의 인연이었다. 애틋한 정이 넘쳤던 부자 사이에서는 당대의 글씨와 그림에 대한 미학, 그리고 역사의 기록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담론이 소통됐다. 이번 발견은 박물관 측의 큰 성과였다.    


그의 저서 첫머리에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라는 세 글자를 받아 서실의 벽에 걸어두고 그것을 판에 새기려다가 미처 못했다”는 내용이 가슴 절절하다. 부친이 생을 마감하자 긍익은 신지도로 곧장 내려와 30년을 쉬지 않고 기록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조선의 야사인 연려실기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한 지난한 싸움이었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