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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닥거리가 끝났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4.03.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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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로 터진 함성 너는 봄, 나는 꽃.
매화가 하얀 숨을 내쉰다.
전체를 그려봐야 잘못 그린 부분이 보인다.
그림에서 붓길을 찾는다. 스승님은 내게 한번도 그림에 대해 조급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작품을 낼 때마다 하시는 말씀, “금방 그만 둘 줄 알았는데 오래도 그리네.”
그 말씀의 의미가 좋다. 좋아하는 일에도 항상 좋은 때만 있지 않았다. 아프다 핑계가 일고, 가끔 급한 일이 생기곤 한다. ”빠지지 마라”


느림의 미학 가르침 따라 부시시한 모습으로 때로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도 출석표를 찍었다. 한 숨이 길어지고 붓이 힘을 잃었을 더욱 신경 써 주신 스승님을 따르지 못함이 마음이 시렸다.


“다음주 이 그림이라도 가지고 와.”
나의 엉망진창인 그림을 챙기셨다. 의욕이 땅에 떨어진 내게 정신이 번쩍났다.
한판 두판 세판...그림의 횟수가 늘 수록 흩어진 구도가 잡혀갔다. 흘러간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드라인 같았다.
누가 소설쓰다 죽었다하고 누구는 밤새 그림 그리다 귀가 멀었다하는데 잘 그리지도 못한 그림 그리다 죽을 수 있겠구나. 겁나지 않았다.


날밤을 꼬박 샜다. 영혼이 탈탈 털려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느꼈다. ”최선이었어요” 소리를 감추고 그림을 스승님께 보여드렸다.


벌써 붓을 놓은지 2년이 흘렀다. 붓길을 잊어 헤맸다. 이번에 포기했으면 다시또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다.해야하는 마음보다 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채본을 받으러 가는 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려가는 사람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 처럼 뒤로 내빼는 걸음이었다.


지난 시간을 뒤적이며 알았다.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며 엄살을 많이도 부렸구나. 블랙커피를좋아하는 게 내 몸에 먹물을 지니고 싶어서 그랬지 싶다. 그림에 몰입에 들어가니 먹는 거 자는 거 아픈 게 싹 살아지고 무릉도원의 세계가 이런 것이구나. 나만의 기쁨이 샘솟듯 하여 정신을 꽉 붙들었다. 종이가 조용히 붓길을 안내하듯 매화는 겨울을 혹독하게 건너왔고 나는 처절하게 겨울을 살아냈다. 삶은 거칠더라도 꽃잎은 부드러움을 잃지 말자. 시간은 없고 밤은 짧고 사각사각 화선지 위에 꽃잎 앉히는 소리가 조용함을 알렸다. 사그락사그락 꽃잎이 부드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앗... 실수! 긋지 말아야할 선을 긋고 말았다.
그때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망쳐도 돼.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
마음이 놓이더니 오히려 더 안정이 되었다.


“실수 해도 돼.” 힘이 됐다.
거꾸로 달린 꽃잎을 그려 넣었다. 꽃잎이 와글와글 뭉탱이로 뭉쳐진 꽃송이를 그려 넣었다.
망쳤어도 끝까지 그려 넣었다.

 

작품 마감 날. 내가 그린 많은 그림 중 망쳤다고 생각한 그 그림을  뜻밖에 그걸 뽑으셨다.
그순간  한밤의 뭉친피로가 싹 가시며 콧끝 세하게 빠져나간 생기가 훅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인생도 끝까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 처럼,인생역전 뒤집히는 순간 예언된 것처럼, 뒤집힌 꽃잎 하나가 오히려 역발상으로 다가왔다.
왠지 쨍하고 쥐구멍에 해가 뜰것 같은 무한의 영감같은 것이라할까..


“할 수 있다”강한 메세지가 온몸으로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살길이 슬픔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북쪽은 폭설이 내렸고, 남쪽엔 매화가 피어날 때, 창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나만의 굴을 팠다. 눈이 다 녹고 꽃들이 만발해도 창을 안 열 것이다. 무덤의 봉분을 연상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불밖 나오기가 관뚜껑 여는 것보다 힘들었다.


현관문 열고 나가는 게 무덤문 여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여겼다.
봄햇살이 기지개 켜고 봄은 이렇듯 따스히 꽃문을 두들긴다.
길다란 초등학교 담장 길을 화통 하나 어깨에 메고 지나는 걸음에는 설레임이 살아있다.


담장의 벽화들과 도란도란 대화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날개옷을 입은 듯 몸과 마음은 하늘하늘 깃털처럼 가볍다.
세상의 모든 풀잎이 신비롭다. 볼을 스치는 봄바람 부드럽다. 나무  위의 새들의 노래가 사랑스럽다. 봄날,꽃걸음으로 아담한 화실에 도착했다. 묵향이 스민 화선지가 벽에 걸려 눈앞에 펼쳐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꿈결처럼  아득하다. 


희미하게 “빠지지 마라”
스승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세월아, 네월아, 가다보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말씀이 가슴에 살아 있었다.
못견디게 답답하고 한심스런 시간들 뼛속 마디마디 한숨이 깊었다.


하얀 한지 위에서 붓을 들고 뚝뚝 떨군 소심한 마음의 소리 “매화를 그리고 싶다.”
가슴속에서 얼마나 뜨겁게 올라오던지 그 다음 날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날렸다.
스승님께 여쭸다. 
소심해서 그런건지, “붓만 들면 떨려요” 
”붓을 드는 사람은 절대 소심하지 않다” 


“아무나 붓을 들지 않는다. 무당도 신기운이 있어야 무당 일을 할 수 있듯이 그림 그리는 사람도 신의 기운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말씀하셨다. 
가슴에 들끓어 오르는 그 무엇인가를 모조리 불살라 버린 후련함을 받았다.
화선지 위에 “그윽한 향기 봄이 움트네.” 
끝내 완성했다.
푸닥거리가 끝났다.

 

이의숙 필수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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