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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길을 잃지 않고 오는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4.02.2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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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풍경들이 내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빗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오늘이 꼭 그런 날인 것 같다. 서로가 자신의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소리.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어수선하다. 


파업 운운하며 들려오는 뉴스도 그렇고 며칠째 내리는 비도 그렇다. 누구는 겨울의 막판처럼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 끝에 정말 봄이 있을까 하는 낯선 목소리도 들린다. 견고한 겨울이 허물어지기를 바라며 모두가 소리에 귀 기울인다. 
지상의 모든 주장이 더 부산해지길 바라는 것 같다. 바쁘게 서성이는 걸음처럼 생각도 부산스럽긴 매한가지다. 


오늘은 3주마다 처치를 목적으로 병원에 다녀오는 날 중 하루다. 진료를 무사히 받았고, 예상대로 치료를 마쳤으니, 운수 좋은 날인가. 진료를 기다리는 많은 환자는 어떤 마음일까. 평상시 같으면 정형외과 진료실마다 환자를 보느라 의사들이 분주하겠지만 오늘은 한 곳만 환자를 보고 있다. 


대기 의자마다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다. 지루한 표정으로 그냥 앉아 전광판에서 이름을 찾는 사람들, 누구의 편일까. 
누구의 편도 아닐까. 


아니면 나만 괜찮다면…. 이런 생각일까. 그냥 생각할 여유도 없이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다. 여기선 늘 기다리는 게 일상이니까. 그런데 오늘 기다림의 이유는 파업이 돼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의료진 파업은 환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가장 클 것이다. 정기적으로 진료나 처치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사람, 아니면 하필 이때 응급 상황이 벌어진 사람은 아마도 파업이든, 의료 정책이든 다 못마땅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엔 3주에 한 번 외과에서 피부 아래쪽 염증을 제거하는 처치를 받는다. 그리고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한 달에 한 번은 내과를 내원해 검사와 처방을 받아야 한다. 병원 진료가 꼭 필요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도 몸이 잘 관리되고 있을 때지만, 상태에 따라 언제든 응급실로 갈 수 있는 게 장기 치료 환자들이다. 그래서 요즘처럼 의료진 파업 관련 뉴스가 들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원활하게 진료가 이루어진다는 뉴스를 기다릴 뿐이다. 


벌써 나에게도 불이익이 오지 않았던가. 처치 후 다음 처치일은 매번 3주 후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달 후로 예약이 잡혔다. 일주일 정도는 염증이 진행된 팔로 통증과 불안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3주 후에 꼭 봐야 한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견디는 게 안되는 더 절박한 환자 때문에 일주일 정도는 견디지 싶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 끝까지 버텨서 정책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환자는 그렇다.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마음이 늘 불편한 사람이다. 환자를 담보로 잡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인가 싶다. 자리를 비우더라도 환자들이 버티며 기다릴 길을 터주고 곁을 떠나야 하는 게 의사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과격한 희생으로 얻어낸다면 그게 억측이 아니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매번 이런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예측하지 못한 정부도 다를 바 없는 건 마찬가지다. 
대책도 없이 밀어붙여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환자들에게 유감이란 말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인가. 환자가 우선시 돼야 하는 의료 정책에서 정작 환자는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삶과 죽음으로 가르는 수술 대기 환자들, 응급 환자들에게 지금을 어떤 마음으로 견디라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병원을 빠져나오는데 환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원으로 들어온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 부질없는 의지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정지한 것은 정지한 대로 시간은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 불안함이 끝나기를 바라며 빗소리로 들어간다.


그칠 줄 모르는 어수선한 소리에 마음을 기대보려 한다.
마른 공기를 가르며 걷는 것도 좋지만 빗물이 꽃눈을 파고드는 걸 보며 걷는 것도 좋다. 이맘때 내리는 비는 겨울이 품고 있는 아득함을 녹이는 비라서 조금 맞아도 기분 좋을 것 같다. 빗방울에서 달큼한 꽃향기가 나는 걸 보니 봄은 길을 잃지 않고 오고 있나 보다. 


제 길을 잃고 우왕좌왕 헤매는 세상에서 제 자리에서 환자를 만나고 있는 의사처럼 봄이 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바람이, 햇살이 따듯해지는 시절이라서. 사람이 따듯함을 느끼는 계절이 멀지 않아서, 3월은 너도나도 3월 같기를.
 

 

김지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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