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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고송 洗然古松,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2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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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 五友歌 中 松 -

 

우리 완도에는 어디에 내어놔도 손색이 없는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 있으니 보길도의 부용동원림(芙蓉洞園林)이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백미(白眉)이다. 고산은 병자호란의 혼란기에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은둔생활을 하고자 제주도로 향하였다.


이때 보길도 연안을 항해 중 겨울철 폭풍을 만나 보길도의 대풍구미(大風구미, 남쪽에서 불어오는 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길도의 서쪽에 있는 조그한 만이다)에 배를 대고 산세를 보니 연꽃이 피어오르는 형국이었다. 


고산은 워낙 풍수에 뛰어났는데 사람을 보내 봉우리마다 붉은 깃발을 달고 섬의 모습을 다시 보니 산세가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섬이지만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아 섬 같지 않고, 토질이 비옥하고 아늑하여, 사람이 살기에 더 없이 좋아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제주도의 은둔 생활을 포기하고 보길도에 터를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 부용동에 정착한 고산은 부용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8경으로 남겼는데 1경 연당곡수(蓮塘曲水), 2경 은병청풍(隱甁淸風), 3경 연정고송(然亭孤松), 4경 수당노백(水塘老栢), 5경 석실모연(石室暮煙), 6경 자봉귀운(紫峰歸雲), 7경 송현서아(松峴棲鴉), 8경 미산유록(薇山遊鹿)이다.


8경 중 제3경인 연정고송은 회수담(回水潭) 안에 방도(方島)를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자신의 호를 붙였으니 그 운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비록 연정고송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연정고송을 대신하여 세연정을 지키는 소나무가 후대에 좁고 척박한 방도가 아닌 세연정지(洗然亭址)의 가장자리에 자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 소나무 수령 또한 250여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완도의 명목 중 하나이다. 


오늘날 세연정 소나무라 불리우는 이 소나무는 그 풍체가 늠름하기 그지없는데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듯 수세(樹勢)가 하늘로 치솟고, 수피는 수백년을 산다는 거북등처럼 골이 깊고 두껍다, 소나무의 밑둥은 어른 두 명이 안아야 품에 안기니 고산이 오우가에서 노래한 눈과 서리를 모르는 소나무와 다를 바 없다.
가지는 복원된 세연정을 피해가기라도 하듯 회수담으로 뻗었는데 마치 물에 달 듯 말 듯 제비가 물수제비를 뜨듯 날아가는 모습이니 고산이 다시 태어난다면 이 소나무에 대한 찬탄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부용동원림은 고산이 1637년 초 봄 51세로 입도하여 부용동에서 85세로 졸 할때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연동의 본가와 부용동을 왕래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던 곳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고산은 인생이 최고조로 농익은 65세에 어부사시사에서 한글로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부용동에 머문 13여년 동안 조성한 원림의 공간은 크게 세연정 지역, 동천석실 지역, 낙서재 지역으로 나눈다. 


세연정 지역은 부용동의 입구로 고산의 창작공간이자 놀이공간이다. 이곳은 고산이 보길도에 입도 후 가장 공을 들여 제일 먼저 조성하였다고 한다. 고산은 적자봉(赤紫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판석보(板石洑)를 쌓아 인공으로 막고 계담(溪潭)을 만들었는데, 물을 가두는 세연지(曲池)와 세연지의 물이 휘돌아나가는 회수담(回水潭)을 만들고 그 사이에 대(臺)를 만들어 세연정을 세웠다. 


세연지에는 마치 금방이라도 뛸 듯한 혹약암(或躍巖)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배치하고 소방(小舫)이라는 배를 띄어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회수담안에는 또 하나의 방도(方島)를 만들었는데 그 방도에 소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를 붙였으니 위에서 말한 연정고송(然亭孤松)이다.


동천석실(洞天石室)은 자신의 처소였던 낙서재에서 바로 바라보이는 산비탈에 조성한 창작공간으로 동천이란 말은 원래 명산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을 일컷는 말로 도가사상에서 신선이 사는 성스러운 곳을 가르킨다. 

 

부용동에서 가장 높은 공간으로 1,000여평의 산비탈을 절묘하게 가꾸어 석담(石潭), 석천(石泉), 석대(石臺), 용두암(龍頭巖), 차(茶)바위, 석폭(石瀑), 연지(蓮池)를 조성하였는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의 제1 절경이라 칭송하였으며, 석실 옆으로는 용이 승천하였다는 승룡대(昇龍臺)가 있다.  


낙서재(樂書齋)는 고산과 설씨부인이 보길도에 머무는 13년 동안 처소로 사용 하였던 곳이다. 서실(書室)을 갖춘 살림집으로 정면으로 동천석실을 바라보고 있다. 주변으로는 소은병(小隱甁)과 무민당(無憫堂), 동와(東窩), 서와(西窩)가 있으며 앞으로는 귀암(龜岩)이 있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귀암에서 달을 감상했다고 한다. 


보길도는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30여㎞ 떨어진 섬이다, 예전에는 완도항만터미널에서 카페리를 타고 보길도까지 직접 다녔으나 요즘은 화흥포항에서 노화도의 동천항까지 대형카페리가 수시로 다닌다. 
해상교통이 좋아지고 삶이 윤택해지면서 국문학을 하는 많은 이들이 고산의 자취를 찾아서 보길도를 드나들고 시가문학을 노래한다. 
어부사시사 동사 한 구절을 노래하며 펜을 놓는다.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텁구나
배 띄어라 배 띄어라 
천지가 얼었으나 바다만은 여전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비단을 편 듯이 하여있다. 
- 漁父四時詞 中 冬詞 -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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