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은하철도 999의 문이 열렸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21 16:03
  • 수정 2023.12.21 16:47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월, 문이 열렸다. 삼국지 책장을 연다.
생과 사의 경계 위에서 날카롭고 예리한 칼을 빼 들고 죽음을 향해 맹렬하게 내달리는 영웅들의 붉은 호흡. 하얀 꽃잎 되어 나리나니 함부로 아름다운 12월의 결이라. 
12월 삼국지 읽기 위해 기다렸다.


당신만 맛있는 곶감 몰래 빼먹는 거 같은 아버지의 새벽 책장소리. 영원한 아버지를 만나는 것 같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열정은 무엇이었던가.

 

조조는 문득 그 자유분망하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열두엇부터 스물이 되는때까지 그는 실로 자신도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휘몰려 보냈다. 어떤 때는 병서에 미치고, 어떤 때는 시사에 미쳤으며,무예에 미치고, 싸움에 미치고,속이고 놀리는 일에 미치고, 여자에 미치고, 춤과 노래와 술에 미치고, 사냥에 미쳤다. 잠시라도 무엇엔가 미치지 않고는 몸과 마음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그의 내면을 뜨겁게 휘몰고 있는 그 정체 모를 불꽃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만 스스로를 지키려 했을 뿐인 것을...... ." "사람은 어떤 경우이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무엇에 몰입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나를 지키는 강력한 힘이다. 삼국지 읽기가 그렇다.
나는 다만 안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사랑한다.


나는 느려서 자세히 볼 수 있었고 나는 느려서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길은 늘 오늘 길이 멀었다.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느림을 알기에 끊임없이 걷는다.산능선이 하얀 구름과 함께 흘러가는 바람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을 두고 어느 날은 집으로 오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먼 하늘을 보고 안부를 물으면 하늘에서 굵은 비를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왜,이리 멀기만 한가. 으랏차차 삼합집에 들러 막걸리와 안주를 시켜 마주하는데 혼자 마시는 술맛이 달다. 함께 할 이웃 친구를 불렀다.


친구와 술잔을 기우는데 눈에 어리는 뜨거운 눈물방울들. 그녀의 시아버지 이야기에 나도 모르는 무의식이 물컹댔다. 그녀의 아버님이 며느리와 말다툼하고 식사를 안한다는 소리에 눈시울이 뜨겁게 달궈졌다. 마음 깊은 곳의 민낯이 올라왔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고 시아버지가 계셨었다.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신다. 내 아버지도 속상한 적 있으셨겠지. 며느리와 말다툼하고 끼니를 거른 적도 있으셨겠지. 그리고 나의 시아버지께서도 나와 말다툼으로 끼니를 거른 적 있으셨곘지. 지나고 뒤돌아보니 다 부질없이 목숨을 걸고 지나쳤다.


"나를 보듯하여 그 양반께 잘해 드려라."
"불쌍한 양반이다."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옛 말씀이 살아났다. 불구덩이속에 나를 쳐넣듯 살아온 내 지난 시간들이었다.차마 흘릴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비가 되어 흘렀다.


이런 날 우산 없이 비에 두둘겨 맞고 싶다. 생각할 틈없이 그녀가  냉큼 투명 우산을 두 개 사왔다. 그녀는 빗물에 약하단다.나는 빗물에 강하건만. 현주언니도 이사가고 민수언니도 이사가고 수진맘 그녀가 이사왔다.
오늘 술 한 상을 시켜 놓고 나의 첫말은 현주언니 덕분에 삭힌 홍어를 먹는 것을 배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뭐 먹을까 아무거나 묻는데 답하고는 끼적대는 모습은 이율배반적이다. 뭐 먹을까 아무거나 답하고 잘 먹는 것은  음식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행동 같다. 
예의란 무엇일까. 부끄럽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날짐승의 고개가 숙여진다.
버럭 지르는 내소리에 칼날이 있음을 내가 들었다. 그 옛날 아버님과 맞짱을 떴다.
꼬박꼬박 댓구하는 나를 두고 "쌍놈의 집안..." 하셨다. 말댓으로 나를 훨훨 불살랐다. 끝내 성질 못된 나는 기절을 했다. 그 후로 단 한번도 내게 소리를 치지 못했던 아버님.


내가 잘못했다. 내게 사과하셨던 아버님.
나를 더욱 철들게 했다. 우산을 둘이 나눠 쓰고 집으로 가는 길, 하늘에서 억수로 굵은 비가 쏟아졌다. 지난 일은 모조리 지우라고. 지운 줄 알았다. 세번째로 삼국지 첫권을 다 읽은 새벽에 친구 시아버지의 부고장을 받았다.  
여고시절 3년동안 한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한솥밥을 먹던 피붙이 같은 친구 순희였다. 


순희에게. 이말 저말 못가는 말을 찾아보니 가지 못하는 핑계의 말들이 일열종대로 줄을 섰다. 순희를 생각했다. 묵묵히 기다려주는 친구. 내 결혼식 부케를 받아 잘 태워주면 내가 잘 산다는 말을 믿고 그리했던 친구.


자취방에 추운 겨울이 오면 방구석에 빨아놓은 걸레가 꽁꽁 얼었다. 연탄가스를 함께 나눠 마시고도 운좋게 살았다. 
내가 집에 가지 않아 쌀도 김치도 가져 오지 않은 날이 많았다. 속 깊은 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란히 놓고서 우리 밥먹자 날 불렀다.
그것을 먹을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가끔은 먹지 않으려고 신경질을 부려도 어쩜 순희는 한결 같이 내 밥을 챙겨 주는지. 그간 잊고 살았다. 아니 지난 시간속에 감춰뒀다. 아름다웠던 청춘의 가난한 그 시절을. 


순희에게 가야겠다.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 모든 시공간은 나와 하나 되어 움직였다. 될 대로 되어 가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일 끝내고 모임 끝내고 집에 들러 옷 갈아 입고 부랴부랴 기차표를 끊어 순희에게 갔다.


간다는 말도 없이 날아간 나를 보고 순희는 울먹이며 "여기가 어디라고" "그리 멀리서 와!"
"꼭, 와야겠다 생각했어;"
열차시간에 맞춰 냅다 달렸건만, 눈앞에서 열차 문이 닫혔다. 열차문을 손으로 두둘겼다. 


"문이 열렸다!" 은하철도 999를 타려는 철이처럼. 그러자, 메텔처럼 예쁜 승무원이 무전기로 문을 열고 결이 고운 목소리로 "기차는 두둘겨서 문열 수 있는 게 아녜요"
"가야해요, 감사해요"


땀방울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거기 기차안이 안드로메다지 싶다. 
"가고자 하면 갈  수 있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무언의 우주언어를 읽었다. 그것은 꿈의 문이 열리는 장엄한 순간 같았다. 


순희야, 사랑은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슬퍼한다. 하지만 맞짱 뜬 사람은 소리내어 울지 못한단다. 순희가 그런다. "불효자는 웁니다, 그런 말 있지." 
서로가 하회탈을 쓴듯 마주 보고 웃었다. 
아프리카 인디안들은 말을 타고 광야를 질주하다 한동안 멈춰 뒤돌아보고 다시 말달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기다렸다 가는 거래. 


내가 그 짝인 거 같았어. 
새벽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아무 것도 안하고 내 영혼이 육체에 안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영혼의 기다림. 
순희를 만나고 온 새벽. 
온몸에 감기가 오셨다. 

 

 

이의숙 필수노동자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