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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반짝이던 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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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반짝이던 날

스위치를 누른다. 꼬마전구 불빛이 잔망스럽다. 줄기가 뻗어나가다 꽃처럼 빛이 피어난다. 마음이 빛의 순서를 쫓아 총총거린다. 감성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다가도 트리에 불빛이 들어오니 설렘도 점등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마음은 옅어졌지만 미세하게 감정의 뿌리에서 파동이 일어난다. 도서관에 설치된 모든 크리스마스트리에 전구를 점등한다. 그러자 무대에 서 있다가 허공에 뿌려진 반짝이 가루가 내게 쏟아지는 것 같다. 마치 보도블록에 떨어진 낙엽 위로 빛과 온기가 더해진 것처럼 빛이 나를 에워싸는 느낌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겐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충분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트리를 본 아이들은 소리의 데시벨이 평소와 달라진다. 산타의 선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소리로 표현한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소리가 도서관에 가득하다. 3층까지 복층구조로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 깔깔깔 소리에 도서관이 들썩인다. 며칠 전 도서관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분주했다. 어린이 도서관이라 이런 날은 직원들에게도 특별한 날이 된다. 
마치 동화책을 옮겨 놓기라도 하듯 그동안 잊고 있던 소녀 소년 감성을 긁어모은다. 신기하고 예쁜 오너먼트를 꺼낼 때마다 탄성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색색의 전구로 마무리할 때는 산타의 존재가 되살아났다. 내게도 어린 시절 그림책 같았고 동화 같았던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추억은 오래될수록 더 깊고 진해지는 건가 싶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문화에 궁핍했던 땅끝에 있는 마을, 그곳에서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게 해줬던 곳은 교회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교인이 아니어도 그 당시 크리스마스는 마을 아이들의 축제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에 모여 무용 연습을 하고 스크루지 영감이 되어 연극 연습을 했다. 학교 운동회만큼이나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었던 십이월의 크리스마스. 내가 겨울에 들어서도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고 따뜻한 이유는 궁핍한 시절을 따듯함으로 채워준 날이 있어서다. 
특히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였던 것은 새벽송이었다. 매년 잠결에 대문 밖에서 들려왔던 노랫소리, 잠깐 눈을 뜨면 어둠을 서서히 밀어냈던 그 소리가 좋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를 따라 새벽송을 함께했던 적이 있다. 축복처럼 눈이 내렸던 날, 가로등도 변변찮던 그 시절 옆 마을까지 새벽송을 갔다. 마을에서 뚝 떨어진 집 한 채, 그곳 주인이 교인이어서 꼭 가야 하는 곳이었다. 
새털처럼 눈은 내리고 쌓인 눈은 무릎까지 올라와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들 정도였다. 이미 길은 없어져 후레쉬 불빛에 의지한 채 앞사람의 등을 따라 걸어가는데 이상하게도 환했다. 어쩌면 눈이 있어서 더 환했던 길, 걸으면서 함께 불렀던 캐럴은 아직도 그 새벽을 내게 성스러운 소리로 간직하게 한다. 
추웠던 기억보다는 따듯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그날 추위 끝에 먹었던 따듯한 팥죽 한 그릇의 몫도 있을 것이다. 
눈길을 뚫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집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새벽 송이 다 끝나자,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상 위에 차려진 팥죽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바닥은 불을 지핀 지 얼마 안 됐는지 온돌이 따끈따끈했다. 새벽 내내 우리를 기다리며 몸을 녹여줄 준비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 집뿐만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준비해 놓은 과자나 헌금을 내어주며 새벽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 별자리 같은 마음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새벽송이 끝나면 조별로 흩어졌던 학생들과 교인들이 교회 마룻바닥에 모여 전리품처럼 받아온 과자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예쁜 포장으로 예배가 시작되면 모여들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라서 특별한 의미를 찾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 다만,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볼 때, 거리 상점에서 주인보다 먼저 캐럴이 반겨 줄 때면 아득하게 멀어진 그날이 떠오른다. 
추웠던 시절 내게  온기였고 축제였던 크리스마스가 부표처럼 떠올라 내 어린 시절의 행복 지점을 표시해 준다. 
오후 늦은 시간이면 하원을 한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몰려든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도서관에 들어와 각자의 방법대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기도 하고 휴게실에서 과자봉지를 뜯어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한다. 트리 앞에서 친구들과 인증 사진을 찍기도 한다. 도서관에서 하루 중 가장 북적이고 활발한 시간. 
크리스마스트리 옆에는 아이들의 소망이 적힌 메모지가 나뭇잎처럼 붙어있다. 
알록달록 남긴 글들이 트리 옆에서 꽃잎처럼 걸려있다. 먼 훗날 아이들의 행복한 순간의 부표 중 하나가 이 도서관의 풍경이었으면 한다. 도서관을 나설 때쯤은 공원에서도 반짝이는 불빛이 맞이할 것이다. 그 빛은 사람들 마음에 하나의 줄기가 되어 따듯했던 크리스마스 추억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빛이 반짝하는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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