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삼국지의 관우, 고금도에서 신이 된 까닭은?

완도 고금도 충무사 역사적 고증 더 필요해
꾸준히 논의 된 묘당도 지역의 자원 삼아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07 16:10
  • 수정 2023.12.13 18:56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긴 수염과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던 사내. 만 명의 군사에 필적하는 용장이었던 촉나라 장수 관우는 어떻게 고금도에서 신이 되었을까? 

완도의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지인 묘당도에는 관우를 기념하는 관왕묘비가 있다. 묘당도의 이름 또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섬’이란 의미를 붙여 새긴 지명이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뛰어난 장수이자 지휘관이었다. 중국역사서에 여러 장수가 나오지만 사당을 지어서까지 추배하는 무인은 관우뿐이다. 명대에 걸쳐 청의 황실에서는 수차례 시호를 내렸고, 마침내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로 관우의 최종 시호를 정했다. 

1730년 청의 황실이 관제묘를 무묘로 바꾸면서부터 관우는 문인으로써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와 같은 무인으로써의 성인으로 등극한 것이다. 청의 건륭제 때 제작한 도성 지도에 표시된 관우 사당인 관묘가 무려 116개인데, 자금성에 4곳, 원명원에 6곳이나 집중됐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왕묘가 임진왜란 때 여러 곳에 건립됐다. 1597년에는 강진현의 고금도에, 진북 용금산에, 전라도 남원부 서문 밖에, 경상북도 성주성 동문 밖에, 1598년에는 안동부와 한양의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를, 1602년에는 한성 동쪽 흥인문 밖에 동관왕묘를 건립했다.

서울 종로에 있는 400년 넘은 동관왕묘를 동쪽에 있는 관우 사당이란 뜻으로 동묘로 부른다. 관우(關羽 162~219)가 죽은 후 관왕(關王)으로 받들었고, 사당보다 격이 높은 관왕묘 중에서 동묘는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14세기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출간되자 조선사회에서 관우는 무신으로써의 큰 인기를 누렸다.

원래 조선에는 관왕묘가 없었으나 여러 곳에 관왕묘를 짓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문이다. 명나라 군은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게 도울 것으로 여겨 1597년 명나라 장수 진린이 고금도에, 성주 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모국기, 1598년에 안동 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설호신, 1599년에 남원 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남방위 또는, 유정이 각각 세웠다고 전한다. 그 역사의 현장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한양에서는 1598년에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남대문 밖에 남관왕묘를 세운 것이 처음이었다. 한양에 관왕묘를 더 지으라는 명나라 요청 때문에 선조는 국난으로 나라가 힘든 상황에서 관우 사당을 더 짓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명나라가 전쟁을 도왔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관왕묘를 세우게 된다. 

선조가 관왕묘를 동대문 밖에 추가해서 세운 것은 “한양도성 동쪽이 빈듯하여 건물을 세우고 연못을 파서 지맥을 진압해야 좋다”는 풍수가의 주장 때문이었다. 1599년 한양 관왕묘 추가 건립 때 명나라 황제는 기술자 파견 등 4천금을 지원하여 1601년 동묘가 완성됐다. 건립 후 명 황제가 직접 현판을 써 주어 동관왕묘에 걸었다.

선조는 동관왕묘를 어거지로 건립했기 때문인지 그곳에 방문한 기록이 없고, 숙종이 처음으로 동묘에 방문했다. 이후, 영조가 17회를 방문했으며, 정조는 선왕들이 방문 때 쓴 글을 비문에 새겨 동무와 서무에 각각 두었다. 남묘는 1899년 소실 후 재건했다가 6.25 때도 소실되어 1957년 사당동에 다시 세웠다.

조선 말, 근대화 과정에서 무속신앙이 불길처럼 번졌고 신흥종교와 관우 신앙도 대세를 이뤘다. 고종황제는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관왕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지, 1883년 북관왕묘와 1902년 서관왕묘를 더 세웠다.

이유야 어찌됐건, 우리나라 관왕묘는 1597년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그의 부총병 등자룡이 고금도에 유진할 때 신력을 빌려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관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낸 것이 그 시초다. 그 뒤 현종 7년인 1666년 전라우수사 유비연이 중수하여 옥천사의 승려에게 지키게 했고, 조정에 청하여 묘정에 서무를 짓고 진린과 이순신을 추배했다.

관왕묘비는 전라도관찰사 이이명이 묘무를 중수하여 비문을 짓고 처음 사액을 청한 후, 이우항이 비석에 글씨를 새겼다. 비는 건립시기와 배경,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과 진린의 행적을 담아 기록했다.

그리고 이이명이 조정에 소를 올려 임금이 직접 ‘탄보묘’라 어필 사액한 후부터 전국의 관왕묘를 탄보묘로 부르게 된다. 1791년 정조의 꿈에 관우가 현몽하자 ‘관우의 탄생을 나라의 큰 은혜로 보답한다’는 뜻으로 관왕묘가 탄보묘로 사액되어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듬해 정조는 등자룡을 왕명으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면서 국난에 기여한 공을 치하했다. 등자룡은 당시 70세가 된 노장이었으나 2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이 위험에 빠지자 그 배에 뛰어들어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1600년 고금도 조・명연합수군통제영이 여수로 이진하면서 통제영의 규모가 급속히 축소됐다. 1953년 묘당도의 관왕묘는 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충무사로 바뀌면서 대대적인 정비를 했다. 1960년 1월 29일 충무사는 ‘고금충무사사적’인 제 114호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금도에 있는 묘당도는 역사적 가치가 살아 있는 완도군의 귀중한 문화자원이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사진은 동관왕묘의 묘비 

.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