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운구행렬 독자적 축제로 만드는데도 고민없는 이순신 기념관

완도만의 이순신 어디에도 없어
이순신과 관련한 인물도 제각각
고증 절차 무시 용역에만 의존해
독창성 있는 지역 상품 개발해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0.19 15:20
  • 수정 2023.11.05 05:41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 영정이 논란거리다. 고금도 충무사의 영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순신의 모습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1973년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했고,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됐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심전 안중식이 1918년 그린 것인데,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두 그림은 모두 작가의 상상화다.

그동안 100원짜리 동전속의 이순신이 논란거리였다. 불패의 장수 모습이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평가를 그의 친구 서애 유성룡은 ‘단아하고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고 징비록에 기록했다. 그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연구자가 많았음에도 그것을 토대로 그렸다. 영정은 한국인들에게 이순신의 본모습처럼 각인됐다. 

장화백의 후손은 이순신 영정 반환과 한국은행을 상대로 저작권료 요구 소송을 냈다. 월전이 친일화가라며 국가가 화폐교체를 의논하려고 하자 유족 측이 반발한 것이다. 최근 법원의 판결은 유족 측의 패소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영정을 두고 논란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 보인다.

유교국가 조선은 조상을 섬기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신위를 모셨고, 왕을 비롯한 국가에 공을 세운 신하는 초상화가 필요했다. 그 시대 초상화는 신분에 상관없이 보이는 그대로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했다. 그래서 검버섯이나 곰보자국까지 뚜렷하다.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때 털 끝 하나라도 같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통영의 이순신 사당에 걸려있는 영정은 국가 표준 영정과는 사뭇 다르다. 착량묘사당에 봉안된 이순신 영정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조선시대 초상화의 걸작으로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심환지(보물 제1480호)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꼽는다. 완도군 신지도에 유배 와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초상화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미인도를 남긴 조선의 화원 신윤복의 아버지이며, 정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신한평이 유배중인 원교를 찾아와 그림을 남겼다. 원교의 초상화는 신한평이 그린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어서 더 값지게 여긴다.

해남군은 1964년 문내면 학동리에 세워진 충무사를 역사적 고증을 거쳐 2017년 문내면 동외리로 옮겨 복원했다. 이전에는 충무공 영정이 도난당해 새로운 영정을 제작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지금은 우수영 일대를 명량대첩의 성지로 가꾸기 위한 자치단체의 노력이 눈물겹다. 모두가 행정의 의지에서 비롯했다.

영정 뿐만 아니라, 전국에는 이순신 동상이 꽤 있다. 한때 초등학교 교정마다 의례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광화문 광장, 유달산 초입, 진도 녹진 등지에 있는데,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나 같이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해남군 우수영에 있는 것은 조금 색다른 모습이다. 2008년 조각가 이동훈씨가 만든 고뇌하는 이순신이다.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었고,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다. 높이 2m, 폭 65cm로 가장 인간적인 이순신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것을 2005년 해남군이 상표 등록했다. 여느 동상과는 다르게 울돌목을 바라보며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을 형상화했다. 전국에 이순신 동상이 많지만 상표 등록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이를 스토리텔링 해서 관광자원 삼을 계획이었는데,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영화 <한산>에서 배우 박해일은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40대의 인간 이순신 모습을 연기해 영화에 투영시켰는데, 그 해 박해일은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울돌목 앞바다에 세워진 고뇌하는 이순신은 지역의 명물로 거듭났다. 진도군이 맞은편에 세워 놓은 호령하는 이순신 동상보다도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해남군 문화관광과의 전략은 좋은 사례로 남았다.

그렇다면 완도군은, 고금도는 어떤가. 지난 7월 고금면사무소에서 열린 이순신 관련 학술대회 때 ‘이순신의 시신이 80여 일이 아닌, 10일 동안 월송대에 머물렀다’며 연구 자료를 통해 의견이 제기됐다. 오랫동안 고금도가 자랑하던 월송대 아니던가. 이미 충남 아산은 대부분의 연구를 마쳤다. 그리고 월송대에서 10일 동안 머물다가 바닷길을 통해 운구를 모셔 왔다며 이순신 운구행렬로 독자적인 축제까지 기획하고 있다.

반면, 완도군은 이순신의 마지막 운구행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도 미흡했다. 완도만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동안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 이에 지역 향토사를 연구하는 단체들의 반론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완도군 행정은 무심했다. 그것보다는 지식을 갖추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적합한 것 같다.

중요한 사안은 학자대회를 개최하고, 여러 연구단체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함에도 완도군은 모든 사안의 복잡함을 피하려고 용역에만 의존했다는 결론이다. 지금 고금도에 개관한 이순신기념관만 보더라도 가리포진과 고금도진의 이순신 행적을 연구하다 보면 이순신과 연관된 이 지역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금도 충무사를 돌아 본 관광객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가 “고금도에도 충무사가 있었느냐”며 의아해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것은 완도군이 우리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하는데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는 방증이다. 지역의 문화자원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한다면, 그 어떤 관광정책을 펼치더라도 우리지역 관광활성화의 성공여부는 묘연할 뿐이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