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진주에서 진도까지 조선수군재건길을 걷는 사람들

강정희 강진대구중 교사

著 다정한 교실에서 20,000시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24 15:32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름 땡볕에 작정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길’을 걷고 있는 전남도교육청 역사문화체험공동체 전·현직 교사들, 이들은 지난 8월 3일 진주 원계리를 출발, 22일간 501km를 걸어 9월 9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할 예정이다. 
출발일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교서를 받은 8월 3일(1597년, 음력)에 맞추었고, 구례 곡성순천 낙안 보성 장흥 완도 해남을 지나, 오는 9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명량대첩 축제 기간 진도에 도착한다. 
이들이 걷는 길은 장차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순신 장군과 남도 수군의병 정신을 기리며 따라 걷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체험을 안내하는 자료집 제작과 영상 촬영을 맡은 교사들이 전체 구간을 도보 답사하고, 지역의 뜻있는 교사와 관계자들이 구간별로 도중에 합류한다. 나는 기록 담당으로 1차 몇 구간에 참여하였다. 
첫날 새벽 알람을 듣고 겨우 눈을 떴다. 기다리던 여름방학,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빛의 속도로 달려서 약속 장소인 지리산 학생수련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지들을 만나 호기롭게 걷기 시작했다. 걷는다는 것은 가히 인간의 속도, 씨앗을 매달고 실하게 여물어가는 강아지풀과 풀씨를 콕콕 쪼며 종종거리는 작은 새들도 눈에 들어온다. 
426년 전 그날도 그러했을까? 우리 강토에 침범한 왜군을 몰아내고자 장군과 수군의병이 물자와 군사와 병기를 정비하여 명량을 향해 가던 그 길을 지금 내가 걷는 것은 벅찬 일이다. 논둑과 밭둑과 강둑을 지나고 마을 골목길과 아스팔트 국도를 걷는다. 
삼거리 사거리 갈림길을 지나고 황토재 공들임재 접치재 구치재 기러기재, 고개도 무수히 넘어야 한다. 묘소와 비석과 정자와 창고 터 등 유적을 살피고, 먼저 공부한 이들의 해설을 듣고, 의견을 나누며 걷는다. 녹음 기운을 내뿜는 지리산 줄기는 변함없이 웅대하고, 구름은 뜨거운 태양에 마냥 부풀어 푸른 하늘에 목화솜을 펼쳐놓은 듯 장엄하다.
구례 지나 하동에서는 섬진강을 따라 걷는다. 송림에서 ‘섬진강문화 재첩축제’가 열린다니 재첩국도 먹고 소나무 숲 정자에서 좀 쉬어볼까 기대를 하면서 걷는다. 
하지만 가도 가도 송림은 보이지 않는다. 낮이 되면서 기온이 사람의 체온 정도로 올라간 것 같다. 덥구나! 더위도 추위처럼 고통이라는 걸 알겠다. 나는 이 여름과 싸워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여름이 되기로 한다. 그러자 몇 걸음 더 걸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방송이 들려온다.
  “낮 기온이 35도로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오니 야외활동을 자제해주시고… ”
무더위 경계 방송을 들으며 섬진강변 데크길을 걷는다. 발바닥이 쓰리고 종아리도 아프다. 목적지는 다가오지 않고 소실점은 멀리 제자리에 있다. 길이란 끝없이 길어서 길이라고 하는 걸까? 
문득 눈앞에 커다란 책 모양의 시비가 나타난다. 이 길이 ‘정호승길’이란다. 하동이 고향인 시인의 시 ‘봄길’이 새겨져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도/길이 있다.…/길이 된 사람이 있다 
 
국어 시간에 아이들과 이 시를 공부했다. 길이란 끝나는 것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길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나는 길이 되기로 했다. 그러자 몇 걸음 더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서 이 길이 끝이 나서 정자나 나무 그늘에서 쉬고만 싶다. 
길에 나선 것을 후회하고 주저앉고 싶은 극한 지점에 그의 음성이 들린다. 
“다 괜찮았다,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삼도의 수군을 이끄는 장군이지만 나 혼자 한 것은 아니다. 호남의 흰옷 입은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고독하지 않았다.”
  길이 된 사람, 큰길 하나를 닦아놓은 사람, 장군 이순신 그의 목소리다. 강하고도 부드러운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웨이도 들린다. 선크림을 바른 얼굴에 땀과 눈물이 섞여 흐른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두 절집 마실은 예정에 없던 덤이었다. 화엄사 마당에서 한여름밤의 ‘모기장 영화음악회’를 만나 오페라 이야기와 피아노 트리오의 연주를 풍성하게 들었다. 내가 일부러 찾아서 듣는 노래를 남성 3인 팝페라 그룹이 불러주었다. 일몬도. 다음 날은 천은사, 경내는 적막한데 캄캄한 계곡에 하얗게 내달리는 물길이 ‘마음을 챙기라’고 무섭게 깨우쳐 주었다.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의 나라 조선을 사랑했던 이순신, 전쟁 중에 일기를 쓴 장군, 전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퍼 스타,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조선수군재건로에 구간별로 이름을 붙이고 풀을 베고 다듬어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나라를 살리려는 이순신의 마음으로, 또한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선 의병의 마음으로, 길이 되어서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완도 고금에 있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