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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불호령 신랑 1주일 동안 여관서 ‘쫄쫄’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윤순정 해녀(7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17 14:35
  • 수정 2023.08.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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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江汀) 물이 강을 이룬다. 즉 물이 아주 풍부하다는 말이다.
서귀포시 강정동은 제주도에서도 물이 풍부하여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몇 안되는 풍요로운 고장으로 예로부터 사람들의 인심이 후한 곳이다.
완도읍 1부두 물양장에는 항상 문이 잠겨있는 잿빛 컨테이너가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완도읍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해녀들의 근거지이자 공동체. 이곳에서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출신 윤순정 해녀를 만났다.
″우리 누님은 집이 어디세요?″
″세림 해변(아파트)인디″
″아니 완도 말고 제주도요?″
″서귀포 강정동이여″
″예~! 진짜요?″
″거그 통물아세요?″
″우리 강정 사람이믄 거그서 다 마시고, 목욕하고, 빨래를 하고 했제.″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몇 마디를 더 나누고서 강정동 토박이 강원병 형님(안타깝게도 지난 늦봄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야기를 하자 "우리 바로 옆집 옆집이자 내 초등학교 동창이여. 또 다른 형님 이야기를 하자 거기는 동생 친구여."
윤 해녀는 물질을 늦게 배웠다고 한다.
″우리 친정 엄마가 물질을 안했어. 그래서 나는 열 여섯에 친구 따라서 물질을 처음 시작했는디 놈들(다른 사람들)은 이미 물질을 배워갔고 원정 물질 나갈 날만 기다리는 거여″
″처음에는 깝깝했제. 그란디 3년 정도 헌께 실력이 늘어서 나도 열 아홉에 동네 언니들 따라서 여수 신장리(금오도)로 첫 원정 물질을 갔어. 그란디 적응을 못하고 한 석달만에 집으로 돌아와 버렸제. 이상하게 물질을 하기 싫더라고.″
″그란디 돌아온 후로 몸이 아파. 그래서 집에서 쉬었어. 그러다 스물 네 살에 포항으로 다시 원정 물질을 갔어. 경상도는 봄이면 성게하고 미역을 엄청 많이 하거든. 그래서 동네 언니 동생들하고 다섯명이서 일을 하고 추석 때 집으로 돌아왔어.″   
 ″우리 때는 해녀들이 원정물질을 가면 선금을 받는 경우가 많았어. 보통 몇 만원을 받아서 집안에 가용돈으로 쓰라고 부모님께 드리고 갔지. 그라면 현지에서 물질이 겁나게 힘들어 일을 열심히 해도 돈을 못 모으거든. 고생만 하고 힘이 쭉 빠져부러. 그래도 악착같이 물질을 해서 추석 때 고향에 올 때는 과일이며, 동생들 옷가지에 부모님 선물 등을 사가져 왔어.″
윤 해녀는 6남매 중 오빠를 위로 두고 큰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가 클 때는 다 못 먹고 못 입고 사는 세상이었잔애, 나도 밑으로 동생이 네명이나 되니 초등학교를 절반이나 다녔는가 몰라. 학교를 가야하는디 동생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그러면 엄마가 오늘 학교가지 말고 애기봐라 하거든!그라먼 그걸로 끝이여. 학교를 가고 싶어도 동생들을 봐야 한께 하루 종일 동생들 4명을 봄서 집안일을 했어. 지금 애기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뭔 말도 안 된 소리를 한다고 하것지만 진짜 동생들을 내가 다 업어서 키웠어.″
윤 해녀 역시 제주 출신답게 젊어서는 난바르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진도(여기서는 조도를 중심으로 한 관매도, 청등도, 거차도, 독거도, 병풍도 등 조도군도를 이야기 함. 섬이 새떼가 날아가는 것처럼 많다고 이름된 곳으로 150여개의 유·무인도가 조도면을 이루고 있어 해녀들의 물질 어장이 매우 넓다)로 난바르를 많이 댕겠어.″
″우리가 난바르를 가면 선주가 해녀들 밥을 해주고 밥값을 일당에서 땠어요. 그런데 난바르 중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완도로 못 온께. 성등포(진도군 조조면)에 입항을 해서 하숙집(숙식을 해결 할 수 있는 시골의 여인숙)에서 지내고, 또 태풍이 불면 밥은 배에서 먹고 잠은 방을 얻어서 자고 대부분 그렇게 난바르를 다녔는데...″
″지금은 조도로 물질을 가도 새벽에 봉고차(스타랙스)를 타고 현장에 가서 물질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배로 하루를 꼬박 가서 배에서 자고 다음날 물질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세상 많이 편해 졌어.″       
완도에는 스물 여섯에 원정 물질을 왔다고 한다.
″완도에는 스물 여섯에 보길도로 물질을 왔어. 그란디 그때 내가 노처녀로 소문이 났지. 놈들은(남들은) 열아홉, 스물, 스물 하나에 다 결혼을 해서 애기들이 다 걸어 댕긴디, 나는 아가씨였고 노처녀 였제. 그란디 거그서 우리 아저씨를 만났어. 우리 아저씨가 해녀배 기관장이었거든. 아저씨가 그때 스물 아홉이었는디 둘다 노총각 노처녀 였어, 그래서 바로 연애를 시작했제"
결혼식은 우여곡절 속에 제주에서 치루었다고 한다.
″연애를 시작했응께 결혼식을 해야 하잔애. 그래서 설(당시 신정에 차례를 지냈다고 한다. 1월 1일)에 신랑 될 사람을 데꼬 인사시키로 서귀포 집에를 갔는디 우리 아버지가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는 거여!" "발만 들여놓으면 다리몽댕이를 뿐지러분다고. 그때는 제주여자들이 육지로 시집가면 흉을 보던 시기였거든. 그래서 서귀포에 여관을 얻어 1주일을 대기했어. 다행이 아버지 사촌 형제간들이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아버지한테 인사시키고 나중에 결혼식을 했제.″
″그란디 그때만 하더라도 설 때는 몇 일간 식당들이 문을 안 열잔애. 그래서 우리 아저씨가 밥을 쫄쫄 굶었제.″
몇 해전 아저씨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낸 윤 해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유독 어깨만 다섯번이나 수술했다고 한다. ″넘어져서, 인대가 늘어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어깨 수술을 다섯 번이나 했어요. 허리하고 어깨만 안 아프면 물질은 힘 닿는데까지 할 계획이지만 사람일이란 알 수가 없응께 어찌 댈랑가 알것어?" 
저녁을 같이 하자는 말에 바닥(바다)에 댕게(다녀)와서 뻗치다며(힘들다며) 자리를 떴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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