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날마다 바다 속 돌 주워오는 대회 우리들끼리 해 내가 항상 일등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김인례 해녀(80)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7.20 15:01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도군의 240여개 마을 중에서 아름다운 마을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마을이 있다.


소안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답다는 미라(美羅)마을이다. 그곳에 마을 앞바다와 서남해안을 내 집 앞처럼 드나들며 60여 성상을 물질로 살아온 김인례 해녀가 살고 있다. 


몇 해 전, 은퇴한 김인례 해녀를 만나기로 하고 소안행 카페리에 올랐다. 그런데 소안에 도착하자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가 세차게 내렸다. 


분명 완도읍은 맑았는데 이게 왠 조화?
마침 친구가 마중을 나와 김인례 해녀가 살고 있는 미라마을로 향했다. ″오매 나 미치것네~ 잉″ ″비가 이라고 많이 온디, 여그를 머할라고 오까 잉?″


비를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 받으며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다. 김 해녀의 인상은 참 푸근하고 좋았다. 물질로 60여년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게 고운 피부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향은 지금 살고 있는 미라마을이라고. 


″나는 여그서 태어나서 80년을 살었어″
″결혼도 여그서 하고 애기들도 여그서 키우고″ 
″우리 애릴 때는 저그 짝지(천연기념물,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으로 미라 8경의 하나)보다는 여그 선창에서 헤엄(수영)을 쳤어. 그때는 선창이 지금 같지 않고 쬐간했거든! 배도 많이 없었는데, 목선으로 노 젖는 배가 대부분이었어″


″그란디 여름이면 친구들끼리 거그서 날마다 헤엄(수영)을 치고 놀아, 그라먼 또 날마다 바다속 돌을 주워오는 대회를 우리들끼리 해. 나는 항상 일등이었제. 방법이 무엇인고 하먼, 물속을 끼어서(잠수해서) 바닥에 깔려 있는 돌을 주서서 나오는 거여″


지금은 비록 은퇴를 했지만 김 해녀는 어릴 때부터 닦아온 출중한 수영실력으로 지방해녀(제주 출신 해녀가 아니면 모두 지방해녀라 부른다)로는 유명한 상군 해녀여서 젊어서 난바르(해녀 배를 타고서 여러 명이 다른 지방으로 물질을 가는데,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여러 날에 걸쳐 물질을 하고 돌아오는 것)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수영은 어릴 때 배웠지만 정식 해녀 생활은 18세에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도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 여러 명 있었거든. 친척 숙모도 제주에서 와서 여기서 결혼을 했어. 첫 물질을 나갈 때 소중이(제주해녀들이 물질 때 입는 옷으로 옆구리를 끈으로 조절하여 옷의 사이즈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옷)만드는 법을 숙모가 가르켜줘서 아조 이삐게 만들었제.″ 


″그 숙모가 재단을 해주면 재봉틀로 박음질을 하고 가슴에다는 자수로 꽃을 놔서 입었어. 그란디 그 이삔 옷을 고무옷(슈트)이 나온 게 다 땡게부렀어. 지금 생각해본께 으째 그라고 멍충했는가 모르것어. 한 벌이라도 놔둘 것인디″  

  
고무옷(슈트)이 처음 나와서 물질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소중이를 입고 물질을 시작했는디 고무옷이 나온께 해녀들이 전부 다 고무옷을 맞춰 입었어. 나는 맨 처음 주문해서 당시 돈으로 25000원을 줬어. 그란디 다음부터는 바로 5000원이 올라부러. 하도 많은 해녀들이 고무옷을 주문한께 거그서 감당을 못 해분 것이여″
제주에서 재작된 고무옷을 입고 물질을 하니 추위도 덜타고 물질 또한 한결 쉬웠다고 한다.


″바다속은 한 여름에도 차디 찬 냉기가 있어. 그래서 오랫동안 물질을 하면 몸이 겁나게 추운디, 고무옷을 입은 께 춥도 않고 물에 잘 뜨고 마치 딴 세상 같드랑께″   
난바르는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20여년을 했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난바르를 시작하여 40대 때까지 난바르를 했어. 그때는 우리 마을에도 해녀들이 많했거든. 선주가 보통 10~15명 해녀를 모집해서 아침 일찍 진도로 출발 해. 그라먼 김치하고 보리 쌀, 젓갈을 챙겨서 하루내내 조도까지 가. 배에서 자고 다음 날 물때를 봐서 물질을 시작하제. 물건이 많이 나오먼 기분이 엄청 좋아.″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고 한다.


″그쪽에 뻘이 많거든. 그래서 뻘물이 일어나면 시야가 안 나와서 일을 3일도 못하고 오고, 또 일주일 예정으로 갔는데 물건이 많으먼 몇 일을 더하는 거여. 그라먼 반찬이 떨어져부러. 그때는 냉장시설이 없응께 반찬을 많이 못가져가, 그라먼 또 동네로 반찬을 얻으로 가고.″


잠을 잘 때도 칼잠을 잤다고 한다.
″난바르 배는 좁기는 해도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어. 낮에 물질을 하고 저녁에 잠 자리에 들면 오만 생각을 잠깐 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어.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사람들이 정도 많았고 바다도 풍요롭고 좋았어.″ 김 해녀는 난바르로 상`하조도, 가사도, 청등도, 관매도, 맹골도, 거차도 오봉산 등 조도바다는 안 다녀 본 데가 없다고 한다.


결혼은 같은 마을의 청년 박전채 씨와 3년 열애 끝에 22살에 했다고 한다,
″우리가 연애 할 때는 시상이(세상이) 어두운 때였어. 교통도 안 좋고 먹는 것도 시원찮고 그란디 우리아저씨가 징하게 쫒아댕게. 그때는 내가 우리 동네서 알아주는 일등신부감으로 이뺏거든. 그래서 어찌어찌 결혼을 했어."


결혼 후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우리 큰딸이 쉰 아홉인디 지금 수원 살고 있어. 내가 조강나루(마을 앞 해안으로 일출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물질을 하먼 우리 친정어머니가 이 딸을 업고서 젖을 먹이로 바닷가로 와. 그라먼 물질하다 젖 먹이고 또 물질하고, 우리 친정어머니가 애들을 봐줘서 마음 놓고 물질을 잘 할 수 있었제.″


큰딸이 조금 크자 동생들을 알아서 돌봐줬다고 한다.
″내가 물질을 가먼 우리 큰딸이 동생들을 키우다시피 했어. 그때는 다 그랬거든. 내가 당일치기 물질로 늦게 와도 큰딸이 동생들을 챙기면서 모두 그렇게 살었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부부가 금강산을 다녀 온 것이라 한다.
″계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금강산 관광을 갔었제. 말로만 듣던 금강산도 좋듬마는 저녁에 써커스를 본디 그렇게 잘 할 수가 없듬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할까 꼭 꿈을 꾼 것도 같드라고″ 


한번도 못 본 서커스였기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자녀들이 어려운 가운데 잘 커서 고맙고 매달 똑같이 용돈을 보내온다는 김 해녀가 물질을 그만 둔 것은 햇수로는 3년이고 만으로 2년이 안됐는데 자녀들도 못하게 하고, 다리가 아파서 요즘은 병원을 자주 다닌다고 한다.


″지금은 우리 돈으로 여그 저그 병원을 다닌디, 쪼간 더 나이 묵고 아프먼 어찔랑가 모르것구만. 그때는 내가 즈그들 키워놨응께 신세를 질랑가도...″
장대비는 다소 잦아 들었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비 온께 막배 탈라 생각 말고 훤할 때 얼렁 가″
김 해녀는 읍에서 온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뱃길을 재촉하였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