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지금은 안할텐디, 60만원 받기로 하고새벽 세시 겨울바다로 뛰어들어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오정열 해녀(69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7.13 15:12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청산도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면 해녀식당이 있다. 이곳이 제주도 우도 출신 상군해녀 오정열 해녀가 운영하는 청산도 맛집이다. 


청산도 주변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지금도 오씨가 가끔씩 잡아서 손님상에 가득 내놓기 때문이다.  


제주어린이들이 다 그렇듯이 오정열 해녀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수영을 배워 초등학교 때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미역을 따고, 소라를 잡았다고 한다.
″우리가 애릴 때는 물질을 배우는게 약간 도제식이었어요. 두서너살 나이를 더 먹은 언니들이 가르켜 주면 따라하는 식이죠.″     


″저는 해녀를 할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찌 어찌하다보니 해녀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 해녀는 아버지가 제주에서 알아주는 도목수였다고 한다. 집안에 여유가 있어 오빠는 부산의 수산고등학교에 유학을 가고 오 씨는 어려서부터 큰 고생은 안해보고 아가씨 때 제주시내에서 양장학원을 다니다 21살 되던 봄 친구와 함께 청산도에 첫 원정물질을 왔다고 한다.


″그런거 있잖아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제주에서 양장학원을 다니는데 돈이 궁해요. 그때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원정물질 갈려는데 한 번 안 갈라냐고요. 그래서 육지에 대한 동경도 있고 딱 한 번만 다녀오겠다고 나섰는데, 청산도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21살이었어요.″
오 해녀는 청산도에 왔던 첫해에 지금의 신랑 최봉수 씨를 만나 돈이 많다는 말에 어린 제주아가씨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신랑이 돈이 많다는 거예요, 그때는 알 순 없었지만 돈이 많다는 말에 결혼 적령기도 되고 해서 덜컥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를 잡기 위한 작전이었어요." 


"저는 애들이 4명인데 동거를 하자마자 바로 애가 생기고 정신이 없었어요.″
오 해녀는 청산에 정착하면서는 난바르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보리쌀과 좁쌀 반찬을 준비하여 통영의 주변 섬과 연화도 주변 섬까지 난바르를 다녔어요. 청산에서 배를 타고 보통 2일에 걸쳐 현장에 도착하면 몇 일 동안 물질을 해서 물건을 모아 부산에서 온 중간상인에게 인계하는 식이었죠.″  


슈퍼맘 오 해녀는 그렇게 악착같이 물질을 하여 애들 4명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고 한다.
″저는 애들을 위한 일이라면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했어요." 
"한 번은 겨울철인데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3시에 선박의 스크류에 감긴 줄을 풀어달라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할 것인데, 당시엔 큰 돈인 60만원을 받기로 하고 새벽 3시 차가운 겨울바다로 망설임없이 뛰어들었어요.″
일을 마치고 나오니 작은 딸이 고드름을 안은 채 울고 있었다고 한다.


 40여년의 해녀 생활동안 후회되는 일을 묻자 몇 가지가 있다고 눈시울을 붉힌 오 씨는 ″사실 아버지가 육지 남자와 결혼한 것을 반대했어요. 그래서 한 4년간은 친정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애들 둘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친정엘 가니 모두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는데 그래도 가슴 한구석은 차갑게 느껴졌어요.″


이후 친정 아버지는 청산도에 여러 번 왔다고 한다.
″친정아버지는 왔다가 갈 때 마다 뱃머리에서 눈물을 훔쳤어요. 저는 괜찮은데 친정아버지 생각은 딸이 고생한다고 느껴서 안타까워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남편하고 저는 주의보로 배가 끈기는 바람에 제주에 가지를 못하고 말았죠.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오 씨의 친정아버지는 소고기를 유난히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아서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소고기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제사 때는 제찬과 함께 꼭 산적용 소고기 값을 보냅니다.″

 

한때는 부모님 기일에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요즘은 돈을 보낼 때가 많다고 한다.  
또 하나는 애들을 정성으로 키우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한다. ″애들이 어릴 때는 바닷속에 해산물이 가득했어요. 물질을 하면 무조건 돈이 되었어요. 전복도 엄청 흔했는데 한 개당 500g 짜리도 많았고.... 그래서 물질을 하느라 애들을 모유로 키우지 못하고 우유로 키운 것이 지금도 가슴 아픕니다.″  

       
큰아들은 청산도에서 전복 사업을 크게 하고 작은 아들은 광주에서 전복을 위주로 한 해산물 전문 식당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오 해녀는 부모의 뒷바라지가 부족하였지만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다며 강원도 평창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