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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고 태왁을 들고 뛰어내렸어 침몰 직전 선장이 배를 살려서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한강님 해녀(83)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7.0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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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紫水明(산자수명)
비록 산은 높지 않더라도 세가 좋고 섬이지만 물이 좋아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보길도!


이곳에도 평생을 물질로 가정 경제를 꾸렸던 토착 해녀들이 있다. 지금은 은퇴를 했지만 한때 이곳에서 상군(上君) 해녀로 이름을 날리며 보길도 일대의 바다 곳곳을 누볐던 한강님 해녀를 만났다.


″나는 3년 전에 물질을 그만 뒀어. 나이도 있고 보길도에서는 나 혼자 물질을 하고, 또 대전에서 살고 있는 딸이 죽어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60 평생을 함께한 바다를 그만 뒀당께.″


한 해녀의 친정은 보길도의 부속 섬 예작도라고 한다.
″우리 증조부께서 거제도에 살고 계셨는데 안 좋은 일로 할아버지께서 증조부님을 모시고 예작도로 오셨어. 할아버지는 당시 장사로 이름을 떨쳤는데 우리 친정집을 맨손으로 지으셨다고 하듬마. 나는 거그서 살다 21살에 이곳 중리 마을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어.″  


한 해녀는 아가씨 때 예작도의 물개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고 한다.
″우리 애릴 때 예작도 애기들은 남자나 여자나 예작도와 예송리 사이 바다를 수영으로 건넜어요. 당시에는 배도 별로 없고 그럴 땐디 물빨 잘 때면(물살이 천천히 흐르는 시간-정조대) 수영으로 건너다니고 모두 그렇게 살었어. 아가씨 때 물질을 하진 안했지만 수영실력이 좋아 살 때(물이 많이 나고 드는 때로 여섯물에서 아홉물 사이)가 되면 섬 주변에서 홍합을 채취했제. 특히 예작도와 예송리 사이에는 홍합이 바다에 깔아져 있었는디 지금은 없어.″ 


시집을 오게 된 동기에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예작도는 마을 앞에 짝지(자갈이 깔린 해변)가 좋잔애, 여름이면 거기서 풀을 매는디(옷감을 만드는 일) 하루는 친구랑 풀매는 일을 하는디 어떤 청년이 짝지를 왔다 갔다 하는 거여. 그래서 이상하다 했는디 그 청년이 신랑이 되부렇당께. 원래는 친척의 중매로 우리 친구를 보러 왔었어. 그란디 내가 맘에 든께 어슬렁거렸다고 하듬마. 나는 그때 결혼은 생각도 안했는디 인연이 될라고 그해 동짓달 열 삿날(12월 13일) 결혼을 했제.″


결혼은 구식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땟마(노 젓는 배)를 타고 예송리로 건너 거기서부터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갔어. 그때는 예송리 고개가 지금처럼 좋지도 않고 좁은 산길로 무지하게 높았제. 재 꼭대기서 친정을 한번 돌아보고 시댁으로 와서 시부모와 시숙님, 시누이와 함께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디 알고 보니 신랑이 군대 기피자였어. 결혼하고 몇 일 있다가 걍 군대에 가부렇어.″


그 후 신랑에 대한 이야기는 시어머니에게 들었다고 한다. ″결혼할 때 신랑이 스물 여덞살이었는디 열 아홉 살 때 마도로스가 되겠다고 부산의 친척집에 갔다듬마. 근디 마도로스가 되도 못하고 청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바로 군대에 가버린 것이었어. 신랑이 없응께 인자 살길이 막막해 그래서 김양식과 함께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제.″


″그때는 중리가 지주식 김도 많이 할 때 인디 나는 신랑이 없응께 김발을 못해. 그래서 친정 아부지를 찾아가니 우리 산에서 솔나무를 비어서 말짱(지주식 김양식에 쓰는 나무 말뚝)을 두때(한때는 10칸으로 대략 20m) 만들어 주듬마. 그놈을 땟마(노 젓는 배)에 실고 노 젓어서 시댁으로 돌아온디 얼마나 힘들었것어. 돌아와서는 시숙님 도움으로 김양식을 했어.″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신랑이 군대에서 전역 후 또 부산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신랑이 군대 제대를 하고나서 일 년 정도 있다가 외항선을 탄다고 또 부산으로 가부렇어. 그러다 1년 반만에 집으로 돌아오듬마. 물질할라 애들 키울라 어려웠는데 그때는 나이도 젊고 그나마 시어머니가 애들을 봐줘서 어려운 시절을 버텼어."  
  한 해녀의 특기는 전복따기였다고 한다.

 

″해녀들이 모두 전복 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특히 전복을 잘 따고 많이 땄어. 한번은 30대 때 예작도 주변의 숨은 여(물속에 잠긴 바위로만 이루어진 섬)에서 엄청난 전복을 잡어 갛고 같이 갔던 해녀들도 모두가 놀라고 입이 쩍 벌어져 부렀는디 당시에 1kg가 넘는 전복을 한군데서 100개가 넘게 잡었어." 


"그 후로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고 또 한번은 노화 당산리 앞바다서 거의 2kg가 나가는 내 얼굴만한 전복을 하나 잡은 적이 있어.″
한 해녀는 물질로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신랑이랑 같이 여러 군데 바다를 사서 물질을 했어. 그때는 우리집에도 해녀가 7~8명 있었제. 또 멀리 고흥 녹동이나 장흥 수문포까지 원정 물질을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었어. 그란디 결국은 신랑이 사업을 한다고 다 까먹고 말었당께.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돈 번 놈 따로 있고 돈 쓴 놈 따로 있다』고 말하는 갑다 하고 다 잊고 살어."     


  60평생 물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묻자, ″녹동에서 멀리(섬은 기억에 없다 함) 물질을 다녀오는데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데 배가 여(수목이 없는 바위 섬)에 걸려 부렀어." 


"해녀들 네명이 탔는데 그래도 살라고 태왁을 들고 전부 배에서 뛰어내렸어. 그란디 침몰 직전에 선장이 가까스로 배를 살려서 돌아온 적도 있어. 그때는 아이고 이제는 다 죽는 갑다 했제 ″ 


애들은 삼남매를 뒀는데 지금은 모두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저씨는 몇 해 전 돌아가시고 혼자 고향집을 지키는 한 해녀는 여든 세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뚜렸한 이목구비와 고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요즘은 TV 시청을 즐겨하는데 드라마와 트롯 프로그램은 빼 놓지 않고 다 본다고 한다. 


물질을 안다니니 심심해서 작년에 고추를 조금 심었는데 옥상에서 말려서 가지고 내려오다 계단에서 넘어진 후 허리가 안 좋다는 한 해녀는 대전에서 치료를 받고 몇 일전 집에 왔다면서 ″나는 대전사는 딸이 이것저것 다 알어서 해줘, 그것이 참말로 효녀랑께.″ 


막내딸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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