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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하다 미끼에 쏘이면 남자 귀신이 여자와 입 맞춘다고 하는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6.3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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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전부터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오늘 만날 주인공은 어떤 분일까? 전화 통화로는 안 만나 준다고 했다는데?  포기하고 다른 누구를 만나로 갈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청산면 모도 서리의 조정희 자매 해녀의 동생을 만나러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오매, 날도 안 존디 오지 마랑께 오네 잉″
2주 전 글을 썼던 조정희 해녀가 동생이 인터뷰를 안 한다고 했다며 헛걸음을 한 것 같단다. 그러면서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동생이 "언니하고 생활하는 것이 똑 같은디 먼 할 말이 있것냐"고 만나는 걸 꺼려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쪼간만 지달려 봐 잉″

 

 

잠시 후, 조 해녀는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하고 똑 같이 생겼제, 내가 여섯 살때부터 키운 동생이여″
모도 서리마을에서 언니와 이웃에 살며 평생 물질을 함께 하고 있는 조정숙 해녀를 만났다. 자매의 성격이 워낙 좋아서인지 조정숙 해녀도 거리감을 두지 않고 편안하였다. 


″어지께는 (인터뷰)안 할라 했는디 언니가 와서 또 말 한게 왔구만″  ″나는 언니하고 같이 할머니 밑에서 컷어. 언니가 여섯 살, 내가 세 살때부터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남철(자석)처럼 붙어서 살고 있제″


″우리 때 제주 애기들은 무조건 물질을 배웠어. 나도 언니하고 같이 할머니한테 물질을 배웠는디 우리 할머니가 하도서 유명한 상군이었어. 92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시다가 93세에 돌아가셨제″
할머니는 물질은 엄하게 가르쳤어도 손녀들을 남다른 애정으로 키우셨다고 한다.
″언니하고 나하고 애릴 때부터 장난도 심하고 그랬지만 할머니가 매 한번을 들지 않고 우리를 키웠어. 항상 할머니를 의지를 할 수 있게 믿음을 주시고 사랑으로 키워주셨어″


그러한 조 해녀가 성인이 되자 결혼한 언니집에 놀러를 왔다고 한다. ″내가 열 여덟살 때 언니집에 걍 놀러를 왔어요. 그래 가꾸 언니 옷을 빌려 입고 소안도 어디론가 첫 물질을 따라 갔는데 제주에서 할머니이게 물질을 배웠어도 소안 바다를 잘 몰라서 진지리(거머리 풀) 밭에서 들어갔다 나왔다만 반복한디, 그 광경을 언니가 보고 동생이 짠해서 울고만 있는 거여. 물질이 끝나고서 둘이서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조 해녀는 마치 몇 일 전에 겪은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해 냈다. 조 해녀는 어릴 때부터 언니를 졸졸따라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는데 일로 헤어지면 울고 만나면 또 반가워서 울고. 눈물을 참 많이 흘렸제. 아무래도 할머니와 살다보니 할머니를 의지한다고 해도 자매의 정이 그 누구보다 끈끈했어″
결혼은 언니가 사는 동네 청년과 연애로 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전라도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무지 꺼려했어요. 전라도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면 흉을 보고 그랬거든, 그때 제주에는 도비상기(엿장수)라고 전라도 사람들이 엄청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어요. 아무튼 전라도 사람을 무척 반대했는데 나 또한 얼마나 웃긴고 하면 언니가 형부를 데리고 결혼 하겠다고 제주에 왔는데 동네 사람들한테 창피하다고 형부 신발을 멀리 던져 버렸어요. 그리고서 결혼은 절대 안된다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왜 그랬는지″


그런 조 해녀도 결국에는 모서마을 청년과 연애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해녀들이 육지에 원정 물질을 오면 보통 서너명이 방을 얻어 숙식을 해결하면서 물질을 해요. 그런데 외롭고 그러니 정에 약해져요. 나도 스물 두 살에 아저씨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는데 언니가 어떻게 알고 형부와 함께 절대 반대를 하는 겁니다.″
이유는 언니 혼자 육지 남자와 결혼하면 됐지 동생까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언니가 어떻게 연애를 한지 알아내서 밤이면 나를 꼼짝 못하게 지켜요. 그러면 가만히 있다가 언니가 잠이 들면 아저씨를 만나로 몰래 도망가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스물 네 살에 결실을 맺어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결혼 후 조 해녀는 3남매를 두었는데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딸 둘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초등학교 때 전부다 서울로 전학을 시켰어요, 서울에 집을 사고 애들을 전부 보냈습니다. 애들 밥은 시어머니가 따라가서 해결했어요. 그런데 큰 딸이 고등학교 2학년때 시어머니가 미국에 살고 있는 시아주버님 한테 가버렸어요, 그래서 물질을 쉴 때는 남편이랑 같이 애들집에서 살고 물때에 맞춰서 내려오고 그때는 돈도 잘 벌고 잘 쓰고 기름 값으로 길에다 돈을 깔고 다녔어요.″ 해녀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부탁하자 젊어서 여수에서 겪은 이야기를 꺼냈다.

 

 

″삼십대 초반에 여수 초도로 해삼바리를 갔어요, 그런데 『미끼(물 쐐기?)』에 쏘여 부렀어요, 이것은 눈에 보이도 안은데 꼭 해녀들의 입술을 쏘는 겁니다, 제주에서는 미끼에 쏘이면 남자 귀신이 여자와 입 맞춘다고 하는데 이것에 쏘이면 아파서 숨을 못 쉬고 거의 죽다시피 해요, 물질은 하도 못하고 저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 받고 돌아 왔습니다.″      


꿈을 묻자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이라 했다.
″건강하게 힘 닿는데까지 물질을 할 생각입니다. 제주도처럼 군에서도 해녀들에게 관심을 갖고 고무옷(슈트)이라도 한 벌씩 사주면 좋겠어요.″
조 해녀는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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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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