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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식물 집사

김지민 수필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6.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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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라고 있다. 베란다로 나온 식물들이 완벽하게 적응했나 싶더니 제법 세상에 얼굴 내민 몫을 하고 있다. 바깥에서 맞는 비와 바람, 햇살까지는 아니어도 창문을 넘어와 몸에 닿는 선선한 공기를 만끽하는 중이다. 


로벨리아가 베란다를 청보라색으로 물들이는 동안 제라늄은 꺾꽂이로 화분 개수가 두 배는 늘었다. 제 살을 뜯어 식구를 늘리는 가상한 식물이다. 칼로 벤 줄기에서 실 같은 뿌리가 생긴 걸 봤을 땐 갓난아이의 옹알이를 들으면 이런 마음일까 싶었다. 


자식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마음으로 토분에 심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라도 되는 양 나란히 줄을 맞춰 놓았다. 물을 흡수할 때 서서히 색이 변하는 토분의 매력을 보는 것도 집사의 재미 중 하나라서다. 햇빛이 들이칠 때마다 꽃봉오리는 다채로운 색이 수 겹으로 포개진다. 한동안 제라는 자신이 얼마나 화려한 몸인지 뽐내는 데 열중할 것이다.


때를 만난 식물은 숲속 나무만큼이나 줄기를 뻗어내며 잎과 꽃을 부풀리고 있다. 집 안에 작은 숲을 만든다. 


나무는 나에게 촘촘하게 자라는 빛이다. 그래서 숲길을 걷는다는 건 내겐 위안이다. 나도 모르게 생기는 결락을 향해 직사광선처럼 파고드는 치료제. 그 역할을 집안에선 식물이 대신한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 내게 약이 되고 힘이 된다. 죽은듯싶다가도 조금만 관심을 주면 다시 힘을 내 새잎을 밀어낸다. 과한 습도로 뿌리가 썩은 제라늄도 성한 줄기를 잘라 흙에 꽂아 두면 언제 병들었냐는 듯 다시 뿌리를 내린다. 가슴을 철렁하게 한 것도 다시 설레게 한 것도 식물이 된 셈이다. 있는 힘껏 살아내는 것들과 교감하며 나도 숨의 간격을 조율 중이다.


처음부터 식물을 키워야지 마음먹은 건 아니다. 뭔가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싫었다. 보살필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식물 집사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류가 어쩌다 보니 종류가 는 셈이다. 시작은 친구가 나눠 준 펠로아 페페였다. 초록색 원형들이 마치 행성처럼 긴 축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사는 곳 어느 한 공간을 우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기묘한 선물이었다. 잎은 또 얼마나 앙증맞게 빛을 내뿜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둥글게 다듬어진다.

작은 슬릿분에서 관심을 주지 않아도 몸살 없이 자랐다. 거기에 자구까지 만드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화원을 방문해 식물을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굳이 다른 이유를 첨가하자면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식물의 성장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든 잘 길러내는 '그린핑거스'는 아니다. 작은 화분 안에서 죽어간 식물도 여럿이다. 


어쩔 수 없이 장기간 집을 떠나서 있어야 했을 때가 있었다. 날짜를 조정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왔을 땐 탈피 후 버려진 껍질처럼 바삭한 사물들이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을 맞닥뜨렸을 땐 보살펴 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한동안 마음이 나락이었다. 다시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서 식물과의 동거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애써 외면만 하다가 동백 때문에 식물을 다시 집에 들였다. 도로변에 있는 작은 화원에서 토종 동백나무를 보고만 것이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홑꽃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 있던 동백나무는 겨울이면 하얀 눈이 보자기처럼 꽃을 감쌌다. 그 이미지는 겨울과 포근하다는 단어를 어울리게 했다. 감나무와 함께 동백나무는 고향으로, 엄마한테로, 아버지한테로 가는 통로였다. 그 선홍빛이 나를 식물에 다시 빠지게 하는 통로가 됐다.

한데서 자라야 하는 동백을 베란다로 갑자기 들였으니 애당초 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으로 들였던 그해에 힘겹게 한 송이를 보여줬다. 대견하게도 적응해 준 것이다. 그 모습에 감격하였으니, 식물을 어떻게 마음에 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식물에 대한 마음은 일방적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식물을 들이고, 원하는 모양대로 전지하고, 꽃을 보거나 잎 무늬를 보며 감탄하거나. 그런데 아니다. 상호보완이다. 애쓰지 않으면 저절로 보이는 것은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식물에도 애정을 준 만큼 되돌려 받게 된다.


더위가 시작됐다. 식물들은 더 목말라할 것이다. 그들이 목이 타 늘어지기 전에 물을 주려면 나의 하루는 더 분주해져야 한다. 나는 기꺼이 그 분주함에 스며들 작정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한바탕 몸살을 앓느라 잎이 타들어 가거나 어쩌면 무름병으로 생장을 멈출지도 모른다. 그러면 난 개체들을 살려내느라 애쓰겠지.

끝내는 영영 보내는 식물도 있을 테고.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식물을 기르면서 생겨난 마음의 움직임이 좋다. 보살펴야 할 것들을 보살피며 나는 나이 들어가는 내가 좋다. 내 잎맥을 찾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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