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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로 가느냐 마느냐? 마지막 퍼팅 눈앞에 펼쳐진 그림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3.05.1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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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당신의 목숨이 걸린 마지막 퍼팅을 맡긴다면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설군 이래 처음 치뤄진 전남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던 최광윤 과장이 폐막 직후, 어디 면장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푸념처럼 내뱉었는데, 면장이 실무 과장보다 쉬운 일이라기 보단 그 만큼 가보지 않는 세계를 갔을 때 찾아오는 고뇌와 고충을 토로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실전에 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위대한 고독을 느끼는 것 같다. 완도로선 훌륭한 자산 하나를 취득했다.
최 과장은 이번 전남체전에서 역도 선수로 출전하는 임정희 선수에게 조심하라고 해줬단다. 그 말에, 그런 말을 들으면 선수는 그다지 기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줬다. 왜냐는 최 과장의 표정.


선수는 누구보다도 끝을 가야만하는 사람이고, 그 끝을 가 본 힘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결정적 순간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 
조심도 중요하지만 조심만하면 끝을 갈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버리느냐?가 중요하다고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서호철 완도군청 역도 감독은 "임정희 선수의 어깨 근육이 2센치 정도 찢어진 부상에도 금메달을 땃고, 이제 훈련을 준비하는 것보다 처절한 고독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고독의 시간을 또 어떻게 보내느냐가 자신을 성장시킬 단초로 작용하는데, 부상은 중요하지 않다. 3번의 부상을 딛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도 있었다"고 했다.


부상의 상황보다도 이후의 태도와 마음가짐, 즉 상황이나 기분이 태도가 되어선 안된다는 말이겠다.
체전기간 허궁희 의장이 사석에서 하는 말이 이번 최경주 선수의 고향 방문은 참으로 의미가 깊었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몇몇 교류하던 지역민들만 만나고 가버려 적잖이 서운했는데, 이번엔 짧은 시간인데도 폭넓은 교류를 하고 갔다는 말을 했다.


그러며 최 프로와 교분이 깊은 전이양 대성병원장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는데, 골프 선수로부터 최경주 프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팔꿈치 부상 중 하나인 골프엘보가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 


전이양 원장 또한 의료인으로서 최 프로가 어떻게 답할 것인지 궁금했다고. 그때, 최경주 프로의 말은 개의치 말고 끝까지 하라였단다. 
나의 끝은 내가 만나 보는 최초의 신이기도 하다. 그 신을 만나고 온 힘이야말로 결정적 순간을 탄생시킨다.


시인도 마찬가지라서 끝까지 가봐라다. 상처 입은 마음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세상의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아우르는,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려는 노력. 그래서 사랑의 끝까지, 미움의 끝까지, 아픔의 끝까지 걸어가보는 것. 갈 데까지 가보아도,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세상을 그리는 사람.


최경주 프로 또한 시인 같았다. 
격의 없는 말 속에 담긴 자유발랄한 기재와 강인한 정신, 그리고 온유한 마음이 조화로워 보였다. 

 

 

전남체육대회 골프샷으로 마지막 성화 점화에 나선 최경주 프로. 당초 바쁜 미국 일정과 멀지 않은 시간에서 국내에서 열리는 골프대회에 참가해야 해서 완도에서 열리는 체전에 참석하기 어려웠다고. 
하지만 교분이 두터웠던 전이양 원장이 나서 "설군 이래 처음 열리는 전남체육대회이고, 지역민 모두가 우리 최 프로가 성화 점화의 마지막 주자가 돼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며 간곡히 부탁했다는 후문.


지난 12일 모교인 화흥초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했던 말은 "인사 잘해라! 끝까지 해라! 그리고 신앙을 가져라"였다.


최 프로의 과거 이야기를 하자면, 까만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의 최경주 프로에게 붙은 별명이 ‘필드의 타이슨’이었는데 마치 당시 세계 복싱계를 주름잡던 핵주먹 타이슨처럼 국내 골프계를 평정해갔다. 98년에는 SK텔레콤클래식 등 2위를 두 번하며 상금은 4위에 그쳤으나 99년에 한국오픈 우승을 비롯해 일본 투어에서도 2승을 거뒀다. 이쯤하면 국내 무대에 안주했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97년 미국에서 열린 골프 월드컵을 체험하고 깨우친 바가 있어 ‘5년 시간을 가지고 PGA투어를 준비하겠다’는 선언했다. 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서 첫 해엔 보기좋게 떨어졌다. 


99년 다시 기회가 왔다. 4월 일본 투어의 기린오픈에서 우승한 데 이어 5월 우베고산오픈에서도 우승했다.
일본에서 시즌 상금 5위 이내에 들면 미국 PGA투어 퀄리파잉 스쿨 최종전 출전권을 주는데 여기서 35위 턱걸이로 2000년 투어 출전권을 따냈다. 당시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지만 최경주는 더 큰 무대를 찾아 미국 투어로 뛰어들었다.


세계 최고 골퍼들이 모인 PGA투어 무대에서 살아남는 길은 연습밖에 없었다. 연습벌레라는 별명의 비제이 싱도 “나보다 더 지독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미국 진출 첫 해엔 네 번째 경기 만에 예선을 간신히 통과했고 다시 큐스쿨로 넘어갔다.


노력의 결실은 2002년 5월 미국 PGA투어 컴팩클래식에서 따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자 동양인으로는 이사오 아오키(1983년 하와이오픈), 마루야마 시게키(2001년 밀워키오픈)에 이어 세 번째였다. 내처 템파베이클래식까지 2승을 올렸다. 2003년에는 유러피언투어 린데저먼마스터즈에서 대회 최소타 기록으로 우승했다.


2005년과 06년에는 클라이슬러클래식과 클라이슬러챔피언십을 연달아 우승했고 2007년에는 잭 니클라우스가 주최하는 특급 대회인 메모리얼토너먼트와 타이거 우즈가 주최한 AT&T내셔널에서 시즌 2승을 쌓아 미국 진출 9년만에 상금 랭킹 4위까지 올랐다. 이듬해 소니오픈에서 승수를 추가하더니 3년 뒤인 2011년에는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더플레이어스를 우승하면서 미국 PGA투어 8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아시아 선수로는 최다승을 이룩했다.


12일 화흥초 후배들의 질문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자, 최 프로는 2000년 PGA투어에 데뷔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했던 퀼리파잉스쿨이었다고 했다.
150명 중 35등 안에 들어야 했다고. 
그래야 PGA투어에서 뛸 수 있는 티켓을 딸 수가 있었다고. 티켓이 없으면 최경주 프로의 ‘PGA 꿈’은 무산될 판. 한국으로 영영 귀국해야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최 프로는 “마지막 날 하루가 남았죠. 그때까지 48위. 순위별로 대충 스코어를 세 봤는데 다음날에 4언더파(-4타)를 쳐야 했죠”
운명의 마지막 18홀. 그 마지막 퍼팅 하나에 미국 PGA에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순간. 


그는 기도를 했다고 했다.
“하나님, 홀컵에 넣게 해 주십시오”가 아닌 “하나님, 제 마음을 비우고 치게 해 주십시오”라며 간절히.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홀컵까지 그려진 선명한 그림. 


퍼팅. 필드 위의 바람은 자신의 손끝에서 아련한 떨림으로 스며들었고, 이윽고 크게 동심원을 그리며 파문을 일으키던 심장소리는 고요해지면서 순간,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공은 눈앞에 그려진 그림을 따라 홀컵으로 쏘옥! 마법처럼 들어가 버렸다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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