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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드림 청해진 신비의 베일을 벗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5.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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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육신은 육신을 낳고, 정신은 정신을 낳는다” 
그리고 “그 정신은 생명을 주지만 육신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그래서 정신이 담긴 이름은 육신보다 오래산다.
그 옛날 아시아에는 수많은 위대한 인물이 살았다.


다가오는 미래의 아시아 건설자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언제 그들은 다시 올 것인가? 얼마나 아시아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일 년? 아니 십 년? 아니면 백 년을? 서양인들의 꿈,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벌써 꽃을 피웠으나, 우리 동양인들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의 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벌써 지나가 버렸단 말인가?


우리에게도 그러한 때가 있었다. 
완도 청해진. 천 2백년 전 당시 한·중·일 바다를 지배하며 해상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와 권력을 쌓으며 아시안드림을 만들었던 곳.
하지만 청해진으로 인해 장보고가 승승장구 하면서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자, 불안해진 귀족들은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염장을 사주해 장보고를 암살했다.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활동 근거지였던 청해진 유적은 그동안 학자들에게 많은 의문들을 남긴 통일신라시대 성곽(城郭) 유적이었으나, 지난 1991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國立文化財硏究所 현 문화재청)의 3차 발굴을 통해 그 규모가 밝혀지면서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또한 장보고대사가 불사(佛事)한 것으로 전해지는 전(傳)법화사지는 상왕봉 자락의 끝자락이자 장좌마을의 서쪽에 있는 사지로 발굴 전까지는 장좌리 주민들의 농토로 이용되다 청해진 유적과 함께 발굴하였다. 사지(寺址)는 원형이 상당부분 유지되고 있었는데 기단 석축을 그대로 논둑으로 이용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발굴결과 많은 유물을 수습하였다. 

 

 

청해진 성은 크게 토성(土城)과 목책성(木柵城)으로 나눈다, 토성은 장도청해진유적의 정상부를 둥굴게 감싸고 축조되었으며 1/3 부분에서 성을 가로질러 내성을 보강하였다. 기법은 판축기법(版築技法)으로 축성되었는데 전체길이는 890m이다. 발굴결과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자연석으로 1~2단의 돌을 폭 5~6m의 간격으로 평행하게 배열하여 기단부를 조성하고, 주변의 흙과 황토 혹은 바다의 갯벌을 이용 겹겹이 다져 쌓아올린 판축토성 임이 밝혀졌다.


발굴당시 성벽의 최대 높이는 2.5m정도였으며 특이한 것은 성벽 축조시 작업구간을 14~16m 정도로 미리 정하고 돌과 나무로 구간을 표시하여 축조케 함으로서 성벽축조에 대한 책임감을 물을 수 있게 해 당시의 사회상과 고대성벽의 축조기법을 밝혀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성과 관련된 시설로는 출입시설(門地)1개소, 관측시설인 치(雉)4개소, 망루인 고대(高臺) 1개소 등이 발견되었다.


목책성(木柵城 원목열)은 그동안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과 장보고선단의 선박접안 시설로 학자들간 의견이 나뉘었는데 발굴결과 청해진성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판명되었다.


목책성은 장도유적의 서남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발굴결과 길이는 331m이고 적경 30m~40m 정도 되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깊이 80cm로 U자형 도랑을 파고 나무를 촘촘히 세운 다음 자갈과 흙을 이용하여 매립하였다. 


원목은 발굴당시 120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아직도 당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나무 끝부분에 끈으로 묶을 수 있는 홈을 파거나 구멍이 뚫어져 있어 멀리서 바닷길을 이용 운반되었거나 아니면 인근에서 벌채하였을 경우 우마를 이용 운반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1930년대까지 지표면에서 일정부분이 남아있었으나 일제의 소나무 공출에 의해 모두 잘려 지금은 대부분 매몰되고 남쪽의 일부분만이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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