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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12월 10일, 비가 그친 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5.0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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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지하철을 바라보며 차마 다음에 또 보자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 다음이란 말만큼 불합리한 말도 없으니까.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멀어지는 열차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 뿐.


 “연수야”
 등 뒤가 오싹했다. 멀리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이야. 그녀였다.
 “어! 안녕.”
 “거 봐. 내가 파마한 머리가 훨씬 잘 어울릴 거라 그랬지?”


 3년 만에 만난 우리가 나눈 첫 번째 대화는 어 안녕, 그리고 파마가 잘 어울린다는 말,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우리 사이에 공백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오늘이 마지막이라도 좋았다. 한 번만 우연히 그 사람을 마주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긴 밤을 울며 보낸 날들이 그 시간부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얼굴도 창백하고. 괜찮은 거야?”
 “밥은?”


 “묻는 말에 대답 안하는 버릇도 여전하구나. 친구랑 먹었어. 괜찮으면 커피 마실까?”
 지난밤, 여진이와 나는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서, 첫 만남처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이미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많이 안다고 해도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우리는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참 많이 달라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늘, 조금씩 변해가는 법이니까. 어쩌면 ‘제발 당신만은 그때 그 순간의 너로 머물러 있어줘.’ 같은 바람은 철없는 어리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약간은 어른인 척 서로의 변화에 대해 끄덕끄덕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첫 번째 책을 쓰던 신인 작가에서 생을 며칠 남겨두고 어쩌면 마지막 책을 준비하는 작가가 되어 있었고, 그녀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에서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아니, 여진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멋진 여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도 글 써? 나 아직 네 책 집에 있는데. 왜 다음 책은 안나 와? 기다리다 지친다, 지쳐."   ”기다리지마. 쓰면 뭘 하냐,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기다렸다는 그녀의 한마디가 내 가슴에 고요한 진동을 남긴다. 따뜻하다. 조용한 호수에 내려앉은 꽃잎이 주변으로 파문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으이구. 진짜 아직도 멍청이네. 이 사람아,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바라봐줄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한 삶이라고 했던 게 아마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네 글, 네가 쓴 거 아니지? 어쩜 그렇게 글은 성숙한데 말은 참 바보같이 할 수가 있지?"


 "그땐 그렇게 믿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마라탕이었니?“
 여진이는 중국어를 전공했지만 불어를 좋아했다. 전공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지던 그녀였지만, 유독 중국 음식중에서도 마라탕만은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마라탕 가게로 가서 그 오묘한 맛을 즐기며 이게 삶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참 와 닿았다.
맞다. 인생은 마라탕처럼 오묘한 맛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맛은 있다.


 "귀신이네. 그래, 마라탕에 소주 한잔 하고왔다. 어쩔래" 
 평범하고 익숙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렇지만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그리운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우리는 왜 3년이란 시간 동 안 지극히 타인으로 살다가 이렇게 우연히 마주쳐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옛 추억을 떠올리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인지, 나와 그녀는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그 답을 각자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창밖으로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고 시간은 비처럼 흘러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촉촉한 기운이었다. 죽기 전에 첫눈을 맞이한 것도, 죽기 전에 그녀를 마주친 것도 내게는 행복이었다.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지난밤 나는 오랜만에, 시를 한 편 썼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번 생을 마치기 전까지, 다시 한번 이 글들을 엮어서 책을 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켜보고 있으면 무언가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고 밝고 명랑한 겉모습 뒤로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한 어떤 외로움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보조개나 이국적인 외모 같은 것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알게 모르게 그 이름 모를 외로움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기분, 그 사람도 나와 같이 어딘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이랄까.


헤아려주고 싶었다. 그 사람만은, 꼭.

 

 

김지현 님은 완도고 재학 중 본보 청소년기자로 활동했으며, 2021학년도 서울여대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녀의 별빛 같은 눈망울은 모두가 잠든 사이, 별들의 가장 깊은 시간 속으로 날아가 별빛이 감춰놓은 그 신비로운 반짝임을 누군가의 가슴에 뿌려 주려고 그렇게 반짝이는 것.
아름다운 국문학도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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