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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봄 마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3.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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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긴밤’이라는 책을 읽는다. 강진읍 군립도서관에서 학교에 찾아와 진행해주는 독서프로그램의 주제 도서인데 학생들에게 선물로 보내와서 내가 먼저 읽는 것이다. 표지 그림이 뭉클하다. 초록 평원 위에서 작은 아기 펭귄이 산처럼 커다란 코뿔소의 코를 어루만지고 있다. 빳빳한 표지를 열어서 두어 장 읽었는데, 지난 주말 우리 가족 나들이 풍경이 떠올랐다.


 놀이동산과 함께 있는 동물원에 갔다. 고개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섞인 파란색, 그 파스텔 파랑을 배경으로 연한 분홍빛 만개한 벚꽃 가지들, 여기저기 연둣빛으로 돋아나는 새순들, 밝아지고 얇아진 사람들의 차림새, 목덜미에 와 닿는 순한 바람, 젊은 부모에게 안기거나 유아차에 앉은 꽃봉오리 같은 아가들, 그들의 손에 들린 원색의 풍선들, 주전부리를 만들어 파는 상점에서 나는 달콤한 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이 묻어나는 노래, 오감이 활짝 열리는 봄….


멀리서 사는 딸이 계획 없이 문득 주말에 손주를 데리고 왔다. 이제 두 돌이 되어가는 손주와 뭘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온갖 동물이 인쇄된 카드를 가지고 노는 손주를 보던 내가 말했다. 
“동물원에 가자.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진짜 호랑이를 보자”


마침 사위도 없으니 잘되었다. 사위는 육아에 몇 가지 정해놓은 규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절대 동물원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에 갇힌 그들을, 구경거리로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생각인가. 우리도 감탄하며 동의했었다. 손주가 꼼짝없이 누워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과 그림 카드로 온갖 동물을 구분하여 알아맞히고 의성어와 몸짓을 흉내 내기 시작하자 슬그머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릇 그 무엇이 되었든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알려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는가 말이다. 잠시 의논을 하는 듯 했지만, 결국 가고야 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꽃구경도 하고 자연 탐사도 할 수 있는 곳으로 봄  마실을 갔다. 


철책 너머 무대(?) 위에 시베리아호랑이는 없었다. 컴컴한 방 안에 누워서 자고 있는데 그 신비한 줄무늬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걸 발견하지 못한 손주는 벽에 그려진 귀여운 호랑이 캐릭터를 가리키며 ‘어흥’이라고 했다. 벵골 호랑이 우리로 갔다. 세상에, 그는 우리 안 좁은 길을 홀로 계속 돌았다. 우아하고 늠름하고 사뿐하게, 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나는 보고 말았다, 그 눈동자를.


최근 대전 동물원에서 얼룩말 세로가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갔다는 기사를 보고 동물원을 검색해 보았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동물원이 113곳이었다. 지구촌 위 어느 동물원은 마지막 방, 출구 앞에 거울이 걸려 있다고 들었다. 그 거울 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고 쓰여있단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벌어지고, 그 아래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한 뭇 생명은…. 말을 잇지 못하겠다. 인간 중심의 지구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생명을 관장할 자격이 있는가.
좁은 우리 안에서 오늘도 밤을 맞이하여 잠들었을 그들을 생각한다. 지평선 아득한 초원과 깊고 그윽한 늪을 꿈꾸는 사자와 기린과 사슴과 하마와…. 높고 멀리 날고 싶은 두루미와 황새와 독수리와 매와….


엄마 코끼리 ‘우리’와 딸 코끼리 ‘봉이’는 오늘도 사육사가 던져준 사과와 당근과 단호박을 나눠 먹고 지금쯤 육중한 몸을 누이고 잠들었을까?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있어서 맛도 모른 채 사과랑 당근을 먹었겠지, 미안하다. 어흥이에게도 미안하다. 응가하는 것을 봐버려서 정말 미안하다.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두 살 손주, 손주와 함께 친구 되어 살아갈 모든 아기들이 어떻게 그 풍경을 기억할지. 


 ‘긴긴밤’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흰바위코뿔소 노든이 자유를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와 사랑을 만나고 가족을 이루지만 잔인한 사람들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아기 펭귄과 여러 밤을 함께하며 멀고 먼 바다를 향해 가는 이야기이다. 
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 이가 펭귄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바다는 어디일지.

 

강정희 강진대구중 교사
著 다정한 교실에서 20,00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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