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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 내 뒤에 선 1천명을 용기롭게 하는 일

창간 32주년 특집 에필로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9.3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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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대표와 오랜기간 친분이 두터운 모인이 하는 말이 "이제 느구 대표랑 산천유람이나 댕길란다" 
30년 넘는 공직생활에 대한 회한적 의미였는데, 편집마감 직후 기력이 모두 소진된 상황에서 들어 다소 약올리는 말로 느껴지길래 “아니, 이제 살만하시오? 누구는 다시 돌아와 밑바닥(필드)에서 박박 기며 X뺑이 까고 있는데, 누구는 5급 사무관까지 달고서 은퇴 후 산천유람 운운하는 게?”


“과거, 살아 있는 권력의 전횡에 맞서 대립각을 세워왔던 동지들의 가치는 새로운 변혁의 완도였는데, 설령 싸울 대상이 사라졌을지라도 혁명가적 시대적 소명을 간직한 채 이제는 저항이 아닌 어떻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까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할 분이... 그 길을 가는 완도신문은 아직도 살얼음판 속에있는데...”


“이제 예전의 혁명가적 실천의 결기는 온데 간 곳없이 조조가 되어서 편집 훈수만 둔다”는 말에 조 면장은 “완도신문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본질적 측면에서 조언할 뿐, 진짜 조조는 따로 있다”는 말로 농담 반 진담 반 서로의 호흡을 빗겨가려는 대화가 종종 오간다.

 

 

긴 가뭄이 지속되고 드디어 완도에 비가 오던 날, 취재차 나갔다가 사무실에 돌아왔더니사무실 바닥에 대야와 냄비가 놓여 있다. 
천정에서 비가 새고 있는지 김정호 대표가 물받이로 대놓고 나간 듯하다. 70~80년대 여느 가정집을 봄직한데, 저렇게 궁핍한 모습을 대할 때면 사람은 초라해지기 마련. 직원의 속도 그럴진데 대표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창간 32주년 특집을 잡기 위해 지난 기사를 조회하면서 여러 곳에서 김정호 대표의 결기를 엿볼 수 있었는데, 그는 완도신문 창간 멤버로 초대 데스크를 맡아 중간에 신문사를 나갔단 말을 들었다. 


얼핏 사주와 편집권 독립 투쟁의 일환에서 편집 제작을 거부하며 결국 퇴사를 하게 됐단 말을 들었는데, 이런 경우 데스크는 자신의 힘으로 신문사가 영위되고 있다고 판단해, 아님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혹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별도의 신문사를 차리는 것이 보편적이다. 각 지역의 제2 제3의 지역신문은 대부분 그렇게 탄생되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 김정호 대표의 진정성이다.


그는 별도의 신문사를 차리지 않고 인쇄소를 운영했단 말을 들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많은 이들이 김 대표에게 제2의 완도신문을 창간해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데스크에게 주어지는 권력욕을 위해 또는 자신이 아니면 완도신문은 안된다 것을 버리는 행위로써 본질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전 대표였던 이경국 대표 또한 완도신문의 후임 대표로 김정호 대표를 택했다는 것. 완도신문 32년 역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한 점이다. 알아 본다는 것. 이런 게 믿음이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길도 갈 수 있는 것이고 그 길을 가는 이를 또, 말없이 그러나 가장 절박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것. 그 두개가 더해진 믿음이란 얼마나 뜨거운지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들은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두 활활 타버리고, 단단하기는 또 얼마나 강력한 지 이 우주의 힘만한 철추가 내려져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온전한 믿음의 상태이며 인간이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믿음도 그것일꺼라.


다시 완도신문으로 돌아와 한 번은 김정호 대표에게 군수 선거에 나가라했더니, 답이 없더니만 어느 날은 그런다. "완도신문을 지키고 싶다"고. 맞다. 혁명가는 열매를 따먹지 않는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혁명의 최일선, 최전선에서 존재하는 사람. 
최근 휴간이냐 폐간이냐?를 고민할만큼 어려운 시기를 맞았는데, 어느 날엔가 김정호 대표의 말이 “완도신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는 것 같다” 했는데, 동의하는 대목이다.


창간 32주년을 맞은 완도신문.
이번 완도신문 창간 32주년 특집의 주제는 '승리'가 아닌 '불굴'로 정했다.
승리의 역사란 내 뒤에 1천명이 있어 내가 용기를 얻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승리만을 탐하게 되면, 그는 누군가를 짓밟거나 점령군이 되어 호가호위하는 것. 그런 역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패배로 기록될 뿐이다.


하지만 불굴의 역사는 내 뒤에 선 1천명을 용기롭게 할 수 있는 일. 그럴 수 있다면 불굴은 세상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
지난 32년동안 완도신문은 승리보단 불굴의 역사를 써 왔다. 그건, 저 빗물받이 냄비가 증명하고 있다(한 6개월째 단수까지). 그것은 뭐, 중요하지는 않다. 하나의 상황일 뿐이니까. 


그 보단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우리가 믿는 언론의 자유를 통해 함께 실천하며 그 무엇이 되는 것이고, 그 믿음이 되어 주는 것이니까.


김형진 본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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