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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의 공전이 지속될 수 있게 힘차게 뛰는 완도의 맥박

인간 존엄에 헌신하는 완도군 경로당 여가프로그램 지도사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2.09.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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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는데...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비유를 통한 멋드러진 표현인데, 이 표현은 법조계에서 나왔다. 한 판사의 판결문이다. 
사건은 과거 임대주택의 실수요자인 고령의 무주택자가 부인의 병수발 때문에 직접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 자신의 돈을 관리하고 있던 딸을 통해 딸 명의로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혼자서 임대주택에서 생활해 온 경우, 임대주택법상 ‘임차인’으로 봐야 한다는 이슈가 있었는데, 주택공사에선 노인에게 임대주택을 내놓으라고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1심에선 공사의 승, 2심에선 노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재판부에선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 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듯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고.
이 판결은 다시 대법원에서 뒤바뀌었지만, 2심 재판부가 판단했던 근거는 법이 탄생할 수 있게한 인간의 존엄이다. 그 존엄에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가 함의된 가치로, 인류는 수많은 전쟁과 정복, 통치의 역사 끝에서 비로소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는 사회적 계약을 이루어냈다. 


이것이 각 나라와 국가의 헌법이다. 헌법 이전엔 종교의 사랑이 왕조의 국가 이념이 됐지만 그도 병폐가 심해졌다. 왕조가 끝나자 좌우익의 냉전과 민주주의를 거치며 국민적 합의에 의한 헌법이 탄생하게 됐는데, 이는 신이 어떤 특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어떠한 본성적인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의 존엄함을 인정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를 기초로 하는 사회가 성립되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은 비록 현실에서 완전히 실천되고 있지는 못하다고 해도 여전히 소중하고 인류가 끝나는 날까지 버릴 수 없는 가치다.


완도군 경로당 여가프로그램 지도사. 
언뜻 보면 레크레이션 강사쯤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 안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적 면모가 깃들어 있다.


그동안 보류해놨던 민원 건의 진행상황을 들어보려 군청 주민복지과의 고영상 과장을 찾았더니, 말도 꺼내보지 못하게 할만큼 바쁜 모습으로 "어르신들 여가프로그램 지도사들과의 만남이 있다"며 "다음기회에 보자"하니, 그럼 지면에 소개할 인물 한 명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최미영 여가프로그램 지도사였다. 그녀는 1995년부터  완도읍에 살고 있으며 현재 나이 53세로 1남1녀를 두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여가문화교육협회 사무국장을 겸하고 있는데, 완도군 경로당 여가프로그램은 2007년 9월에 창립하여 올해로 15년이 되었다고.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완도군이 12개 읍 면 경로당에 지도사들을 파견했다고. 지금은 21명의 프로그램 지도사들이 12개 읍 면 175개소 경로당 어르신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있단다. 지도사들이 하는 일은 무료하게 앉아서 tv만 보거나, 누워서 주무시기만 하던 어르신들에게 웃음 치료와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근력운동, 치매를 예방하기 위한 뇌운동을 도와주면서 어르신들이 궁금해 하는 세상 소식과 완도군의 소식도 알려주는 말벗까지.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냐고 묻자, 최미영 지도사는 노인대학 레크레이션 강사로 활동하면서 어르신들의 행복한 노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완도군에 어르신들의 여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어려웠던 순간에 대해서는 역시나 코로나.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경로당과 노인대학 운영이 중단되면서 매일 뵙던 어르신들과 교류가 끊어지자 여가프로그램 지도사들의 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난 요즘은 다시 희망에 부푼 시간이 되고 있단다.

 

 

기뻤던 순간에 대해 최 지도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심한 듯 앉아계시는 어르신들이 프로그램 진행 후 밝아지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참 뿌듯합니다" 
"가끔씩 어르신들의 자녀들로부터 우리 어머님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화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내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어르신들은 자녀들에게 우리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을 하신답니다"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해선 아낌없는 조언과 많은 지원을 해주는 완도군청 주민복지과와 현장에서 프로그램이 잘 진행되도록 협력을 해주는 각 읍면 경로복지담당자들이라고 했다.


그녀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것들이 있다. 사랑이라든가 믿음, 희망 같은 것들. 이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런 무형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 반대의 영역인 고독과 빈곤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외로움과 빈곤함은 사회 깊숙이 숨어 들었고, 마을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이웃의 생활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고독과 빈곤을 감추어 버렸으며 그들을 숨겨버렸다"


"외롭고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존엄없는 사회로써 존엄이 사라진 사회는 죄악으로 물들어 가는 사회다"고.
"복지제도가 바뀌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을공동체의 복원도 중요한 것 같다"면서 "아래로부터 이웃을 돌아보는 함께 사는 삶의 문화가 형성되고,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제도가 확립될 때 인간의 존엄성도 온전히 지켜지게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며 "행복한 노년은 본인이 살았던 곳에서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이웃들과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완도군의 어르신들이 행복한 노년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그 여정을 실현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쓰는 완도군과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파트너가 되겠다는 각오로 함께 하고 있는 여가 프로그램 지도사들에게 감사하다"  


완도라는 항성에서 존엄의 공전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오늘을 가치 있게 뛰는 그들의 맥박 때문이다. 그들이 멈추지 않는 한 존엄의 맥박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사랑과 온기 가득한 에너지는 충만한 결실을 축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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