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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가을물결 같고 모습은 옥으로 다듬어 놓았도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2.08.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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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연육이 된 신지면. 
일제강점기, 이곳은 반농반어의 섬으로 인구도 적고 농토도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완도에서 평균적인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공립보통학교가 다른 읍면들에 비해 늦게 세워졌고, 사립학교도 학술강습소 형태로 세워지긴 했지만 일제에 의해 곧 폐쇄되고 말았다. 
따라서 신지도 청소년들의 교육 수준은 다른 섬들에 비 해 낮을 수밖에 없었으며, 항일운동도 다른 섬들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신지도에서도 몇 건의 항일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우선 1919년 3·1운동 당시, 신지도 출신 차종화는 김우진과 함께 완도 본섬에서 완도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이를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찰에 의해 미리 탐지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1924년에는 신지학술강습소를 세운 임재갑과 교사 김재희(김정상)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순회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 내용과 이동 중에 학생들이 부른 노래(혁명가)가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대정 14년(1925) 형공법 제140호의 판결문을 보면, "피고인 임재갑은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소재 사립학술강습소 교원으로서, 피고인 김재희는 유한단원으로서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공모하고 대정 13년 8월 중 동 강습소 생도 약 50명, 유한단원 6명과 같이 강연단을 조직하고 피고 스스로 해 단원을 이끌고 동월 11일 이후 동월 16일까지 동면 신상리, 월양리 동고리, 송곡리, 신리, 대곡리를 순차 순회하고 각 리의 야외에서 동리민 약 100명을 소집하여 강연단 중의 수명으로 하여금 강연시에 피고 김재희가 조선 민족성은 관대, 박애, 예의, 염결, 자존에서 이룬 관대한 성격을 갖고 있는 고로 조선민족은 스스로 모욕을 당하더라도 가가대소하고 감히 보복하려 하지 않으며, 일본 민족과 같이 보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고..."(후략) 


검찰 측은 두 사람 외에도 다른 두 명의 교사인 송기호와 김창선도 구속하였는데, 역시 학생들에게 불온한 창가를 가르쳤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재판에서 임재갑과 김재희는 10개월과 1년의 징역을 각각 언도받았던 반면, 송기호와 김창선은 무죄를 언도받았다. 


1925년에는 강습소 학생 양양순 등 6명이 신지도 경찰주재소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 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장흥검사국의 예심에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또 1943년에는 황의영이 한 상가에서 잡담 중에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 패하고, 조선은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양 모라는 사람이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른바 유언비어 유포혐의였는데,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언도받았다. 

 

장석천
장석천

 

한편 신지도의 항일운동가로서는 임재갑과 장석천을 꼽을 수 있는데, 임재갑은 신지도의 항일운동을 사실상 이끈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송내호가 조직한 비밀 결사 ‘수의위친계’에 참여한 바 있었으며 신지학술강습소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 할을 하였고, 당국이 이를 폐쇄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혁명가 사건으로 인하여 10개월의 옥고를 치러야만 하였다. 그는 신간회 완도지회 지회장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장석천은 보성고보와 수원농림, 동경상과대학 등을 다닌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1926년 광주에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28년 이후 광주의 청년운동을 사실상 주 도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장재성과 함께 11월 12일 학생들의 2차 봉기를 이끌었고, 17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에서 조선청년총 동맹, 신간회, 고려공청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서울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일으키고, 나 아가 전국적으로 이를 확산시키기로 의견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를 위해 서울의 학생 대표들을 접촉하여 여러 학교에서 시위를 일으키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경찰에 의해 결국 탐지되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12 월 9일 서울에서는 여러 학교에서 동시에 시위, 맹휴가 일어났으며, 이후 학생들의 시위 와 맹휴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듯 완도군 신지도는 일제강점기에 소안도와 함께 ‘저항의 섬’이었다. 신지항일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 토지소유권 회복을 위한 소작쟁의 등 전국적인 항일투쟁으로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말 할 수 있다. 한편, 지금까지도 항일운동의 맥이 살아 숨쉬는 완도군 신지도에는 항일운동 정신 계승을 위하여 신지항일기념사업회(회장 차용석)를 구성하고 매년 국경일에 지역기관사회단체와 함께 참배 행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인근 초중학교 학생들에게는 항일운동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산교육의 장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차용석 신지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은 “신지항일운동기념공원은 신지면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훈과 일제에 맞선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널리 후세들에게 알림으로써 애국을 고양하고 우리지역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가족단위로 이곳에 오셔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애국을 고양하는 교육장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궁희 완도군의회 의장은 “신지항일운동기념공원은 항일운동의 성지로 우리 지역의 자긍심을 고취시켜주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역사적 정신과 공간을 활용하여 명사갯길 걷기~신지명사십리에서 열리는 군단위 서맥전 행사 개최 ~ 신지항일운동공원 역사탐방 ~ 이광사문화거리 탐방을 연계한 대규모 관광과 역사를 연계한 행사가 꼭 필요하다면서 완도군에서 적극적으로 개발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고 있다. 누군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그 피의 정신은 가을물결처럼 푸른 창공에 깃들어 있고 그 피의 모습은 옥으로 다듬어 놓은 듯 진리로 살아숨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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