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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으면 나 있고 그대 없으면 나도 없다네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가장 아름답게 퇴장을 고하는 완도군의회 이범성 의원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2.06.30 16:22
  • 수정 2022.06.3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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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언론과 파이터들이 신처럼 추앙했던 인물,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 실전을 중시하는 극진공수도를 창시하게 되는데, 그가 생전에 가장 흠모하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는 단 한 번의 대결에서도 패하지 않은 전설적인 검술가이자 화가인 미야모토 무사시다.


오륜서를 쓴 무사시는 "지금 싸우고 있는 적이 마지막 적이다. 싸움은 1회 뿐이라고 생각하라.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번 적에게서 지지만 다음 적에게서 이긴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1계명으로써 "이 순간 결코, 머뭇거리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허울이나 명분과 이상, 모두 다 좋은데, 무도의 마지막 진실은 적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헛된 유파와 눈앞의 형식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본질이든 비본질이든 무엇이 됐든간 시작했다면 증명하는 것 뿐이다. 

 

 

제8대 의원 중, 가장 현실적인 아니, 가장 실전적인 의원을 꼽으라 한다면 이범성 의원이 차지할 것 같다. 이 의원은 정치적 이슈나 유권자로부터 인기를 얻으려는 발언이나 관심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전복,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복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건, 한결 같았다. 이 의원의 8대 의정활동을 보면, 전국 전복 생산량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 완도 전복산업이 둔화되지 않도록 ‘전복 수급조절 안정대책’ 마련을 촉구하는가하면, 전복주식회사의 정상화를 위한 부단한 진언, 전복과 해조류의 안전적인 판로 확보를 위한 중앙부처에 다양한 의견 건의.

 

 

여기에 완도군에서 유례없이 행정과 군민이 갈등하고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던 ‘완도 변환소 및 고압송전탑 건설사업’과 ’기업형 돈사 신축사업‘에서 군민 화합을 위해 반대 결의에 앞장서면서 관계 부처의 공식사과를 받아내는 등 자리와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에 이르는 실천력으로  그 정점에서조차 아름다운 퇴장을 선택한 이범성 의원.


개인의 사업(이익)을 위해 전복산업에 대해 그리 행정을 질타하고 방향성을 제시했냐고 묻자, 이범성 의원은 특유의 웃음을 보이면서 "아니다. 완도신문에서도 군의회 최고 재력가는 이범성이라고 보도하지 않았느냐!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전복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이고, 또 우리 주민의 실질적인 삶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또 "주민의 현실적인 삶을 돌보지 못한다면, 행정과 지도자의 역할은 무의미하다. 완도의 근간인 전복산업을 왜, 버릴 수 없냐면 전복값이 좋아야 생산자들의 주머니가 풍족해지고 그로 인해 완도읍권에서의 2차 소비도 활발해진다"면서 현재 완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제구조가 이것이다고.


그래서 전복주식회사를 절대 죽이면 안되었다고 했다. 행정에 주문했던 건, 그러한 공공성 있는 유통판매회사가 올바르게 자리잡고 있으면 최소 100어가 이상을 먹여 살리고, 나아가 완도전복산업을 지탱할 수 있다고 전했단다. 계속해, 완도에서 생활해 왔냐고 물었더니, 이 의원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아 당연히 객지 생활부터 시작했다고. 서울의 건설회사에 취직해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해녀사업과 일본 무역선 일을 하게 돼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에게 잠시 의탁했단다.


하지만 계속 아버지 곁에 머무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쌀 한 말과 현금 2만 5천원을 가지고 나와 셋방 생활을 전전했다고. 당시 우진산업이란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전복 또한 그때 알게 됐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일본 바이어가 이범성을 내보내면 거래를 끊겠다할 정도였다고.
그렇게 직장생활을 몇 년간 하다, 자신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맨손으로 전복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전복 공부를 참 많이도 했다고. 산란 방법부터 생육 전 과정, 전복 자동화까지 초창기부터 했던 것들의 결과로 신지식인상에 올랐고, 대통령 산업훈장은 나이가 적어 대통령 산업포장을 받았다고 했다.
고금 양식 어민들도 전복치폐에 이범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으며 박종연 전 의장 또한 이 의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그러며 전복으로 자수성가해 동생의 분가까지 책임졌다고.


그럼, 부인은 어떻게 만났나고 물으니, 그때를 회상하는 지 잠시 말을 멈추는 이 의원. 자신은 목포상고 출신이고, 부인은 광주여상 출신이었다고 했다.
이 의원이 군대에 입대했을 때 소속이 청와대 30경비단이었는데, 경비단 의복이 멋있었단다. 부인은 참 똑똑한 아가씨로 수협에서 여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친구여동생과 친구로 경비단 제복을 입고 휴가를 나왔을 때 호감을 느낀 것 같다고.
똑똑하고 재기발랄한 모습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 같았단다.


그의 아내는 딸이 8명인 공직자 집안의 막내 딸로, 결혼 당시 7명의 처형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자신은 범띠이고 아내는 박인철 의원과 동갑인 범띠라고 했는데, 이름을 물었더니 소안면 비자리 출신의 '박순천' 
아내는 가정을 안정되게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어떤 일을 하든 은행에 부채가 없게 하는 것이 사업의 1목표라서 돈이 모아지면 은행빛부터 갚았는데, 아내는 남에게 10원만 빌려도 잠을 못자는 성격이었다고. 천원을 안쓰기 위해 시장을 안 갈만큼, 아이들과 집안, 그리고 사업에 너무나 헌신적이었다고 했다.


발을 뻗음 발이 걸리는 집에 살 때, 한 번은 처형이 방문했는데도 집안을 안보여주려고 다른 곳에서 만날만큼 자존심 또한 엄청 쎘단다. 슬하에 아들은 시어머니의 강요 아닌 강요에 의해 그것만큼은 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때는 무척 힘든 시절이었다고 했다.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보내고 유치원 입학 때 데려왔는데, 둘이서 미역 공장을 다닐 땐 정말, 매 순간 사선을 넘나들만큼 힘겹고 고된 시간이었다고 했다.


한참 의정활동에 바쁜 이 의원에게 아내가 물었단다. 다음 번엔 어떻게 할라냐고?
이 의원은 의정활동에 대해 2번은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한 번은 배우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배운 것을 베푸는 시간이란 생각에서.
하지만 아내의 고생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내의 그 말이 나오면 이 의원은 "다음은 자네 하란대로 할라네"고 했단다. 아내는 겉으론 이 의원이 정치를 안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허궁희 의장이 이 의원의 부인을 볼 때마다 "사모님 다음에도 롱런하자"면 아내는 허 의장에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아내의 내심엔 이 의원의 의정활동을 지지하면서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고.


그는 이 대목에 이르자 더는 못하겠다며 인터뷰를 끊었는데, 그 눈빛 속에는...

 

어느 하루라도 보고프지 않았던 그런 날
그런 날이 있었을까요?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립지 않은 그런 시간
그런 시간이 있었을까요?
그대를 만난 이후, 기적이 아닌 그런 때
그런 때가 또 있었던가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를 만나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대 있으면 나 있고 
그대 없으면 나도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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