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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이는 정지원이란 불멸의 섬광을 만났다

제50회 완도군민의 날 군민의 상 수상자 목하 정지원 선생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2.06.16 13:20
  • 수정 2022.06.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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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붓이란 한 사람이 되고, 하얀 종이는 이 우주를 펼쳐놓은 삼라만상. 
그래서 붓이 한지 위에 서는 순간, 이 우주는 어떤 탄생을 할 것인가를 긴장하며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다.


단 한 번의 인연에서, 단 한 줄의 시와 단 한 장의 그림에서 전생애의 전모를 일점집중. 한 방울의 먹물이 종이 위에 떨어질 때,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이 창조해낸 하나의 우주, 빅뱅을 보게 된다.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은 용맹한 하늘사자와 같았다. 휘날리는 갈기는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 듯 삼라만상 위를 내달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늘의 빛감과 땅 위의 색감을 모아 목마름의 정상에 이르렀다. 


그 목마름의 정상에 이른 하늘사자. 
삼라만상이 모두 숨죽이며 한 생명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릴 때, 숨 한 번 크게 들이킨 후 우뢰처럼 표효하며 지상으로 내달려 저 깊고 깊은 영혼의 동굴에서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을 찾아 세상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웅혼한 바람으로 화(化)해 끝도 모를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청량감을 선사하며, 고독하게 산허리를 돌아가는 미려한 구름 안개를 끌어주고서, 어느 봄날 돌담 밑 한송이 들꽃을 지키는 갸륵한 속삭임이 되었다.


작은 모래알 하나에서도 아름다운 꽃한송이를 피워나는 가하면, 무(無)를 쥔 손바닥 안에 사라지지 않을 영원의 불멸성을 가두는 사람. 
 

 

그가 목하 정지원 선생. 제51회 완도군민의 날, 군민의 상 수상자다.


그의 호흡을 느끼려면 저 칠흑의 바다에서 태어난 사랑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완성되는 지행합일(知行合一) 그 일로매진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평생동안 1천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다던 추사 김정희는 자신이 한껏 깔아 뭉긴 원교의 그림을 보고 당장에 “떼어 내라고” 일갈하면서, 붓을 들어 일필휘지 '무량수각(無量壽閣)' 넉자를 써줬다. 하지만 오랜시간 제주 유배길에서 해배 된 이후, 다시 찾은 대흥사에서 추사. 자유분방한 필치에 선비의 기품과 평온함을 내재시킨 원교의 대웅보전과 자신의 오만과 독선의 기름기가 좔좔넘쳐 흐르는 무량수각의 글씨를 보게 되자, 초의에게 “원교의 대웅보전을 다시 내거시오”했다.


그건 단순한 글씨의 우위만이 아니었고, 학문의 깊이나 지혜의 우위 또한 아니었다.
다만 알고나면 반드시 행하는 지(知), 즉 덕(德)과 하나로 합일한 지(知)였다.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이른바 ‘앎’이란 진정한 앎이 아니다. 추사의 깨달음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 내가 올바르게 사느냐 잘못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양명학의 요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묘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철학자이면서 사상가인 이광사의 삶을 연모하며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는 목하 선생. 

 

 

서예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해 정지원 선생은 "결론부터 말한다면 서예가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예를 들자면 순천에서 서예공부를 할 때 3박4일 동안 자지 않고 또한 쉬지도 않으며 계속 먹을 갈고 글을 쓰면서도 지루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서예가 좋았으면..."


 "그 다음의 동기는 완도에서 서예를 지도하는 것이였는데 서예를 해보니 예술의 심오한 것을 느끼게 하며 정서적이고 마음의 수양과 함께 문학적 지식을 자연스레 익히게 되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서예) 완도에 보급하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즐길 수 있는 취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이 실감되는 목하 선생의 말.
천재의 부단한 수련, 그 수련이란 기교만이 아닌 정신과 마음이 합일돼야만이 비로소 명필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말.


선생은 “글씨에도 품격이 있다. 내가 안목을 기르고 글씨에서 묻어 나오는 향기를 느낄 수 있을 때 나 역시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붓과 먹, 종이, 벼루의 전문 소양을 갖추고 품격이 느껴지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자,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하나의 추억이었지만 1989년도 서예 학원을 개설 하였는데 수강생이 없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심정일 때 친지와 후배들이 광주와 서울에 와서 살자고 동정의 손길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어디에서든 성공할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참고 견디는 기간이 약 1년여 정도였다고.


가장 기뻤던 순간에 대해 목하 선생은 "완도에서 붓을 세운 후 두 번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1997년도 원교이광사가 신지에서 동국진체와 서결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2006년 대한민국 서예대전(국전)에 초대작가로 인준 받을 때 였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은 이광사의 서화를 맥을 이어가고 이를 완도의 아름다운 문화로 정착되기를 바람이고 또한 국전 초대작가는 당시 인근 군 단위에는 초대작가가 한 명도 없었기에 개인적인 자랑과 완도의 자랑이기에 기뻤습니다"


가장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해, 그는 지금에 와서는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지만 가장 어려웠을 때 잊을 수 없는 몇 사람들을 지난 2015년에 자화상을 그리고 그 화제에 고마운 분들을 잊을까봐 써두었던 내용을 대신할까 한다고.


그러며 “일천구백팔십구년 지필묵연 봇짐하여 이곳 완도에 왔노라! 법첩과 비첨의 안식이 무수한 지역이기에 세한의 중고를 겪을 때 고 이경국 외 지주가 되어 주신 양승구, 차용무, 이종열, 박정식, 추은희, 천양숙, 최병대, 김선동, 임재홍, 배철지 님들외 많은 분들의 오늘에 와 있으니 완도 서화의 예술적 발전만을 위하여 성과 열로 여생을 마치겠노라라고 써두었습니다"고.


하고 싶은 말에 대해 정 선생은 2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원교이광사 기념관 건립이고 원교이광사 추모 전국서화 공모전이라고.
"이광사의 기념관은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국 공모전은 어렵지 않게 기반이 닦아져 있다"고 했다,


또 전국 지도층에 있는 200여명의 서예인 들과 긴밀히 교류하고 그들은 이미 원교이광사 서맥 전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공모전을 하라는 조언을 하고 있단다.
그렇게 되면 원교의 위상과 지역문화의 전수는 물론이고 어린 꿈나무들에게도 멋진 문화가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다고.


무릇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삶이든 세계든, 따로 또 같이 서로 어울리며 스스로를 영위해 가며, 빛의 소용돌이 속에 드러나는 한때의 광휘와 쇠잔은 일상의 크고 작은 일 속에 널려 있다. 
그것은 미묘한 모호성으로 서로 뒤섞이면서 삶을 드러내고 또 지운다.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그 경계는 확연하게 긋기 어렵다. 


그의 세계는 이 소멸의 변화와 분열에서 자기 갱신을 표현함으로써 떠나가는 것에서 지속하는 것을, 사라지는 것에서 이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를 보고 읽고 듣는 사람의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온몸으로 전달시켜 또 다른 나를 창조케 한다.
그가 선사하는 예술은 그래서 진리며, 창출된 그의 세계는 새로운 진리의 계시, 내 영혼과 맞닿아 세상을 풍요롭게 하려는 창조와 희생적인 헌신, 그리고 이 우주를 탄생시킨 쉼없는 생명력으로 순간순간 그 영혼 안에선 번쩍이는 정지원이란 불멸의 섬광을 그렇게 만났다.


"축하합니다" 


아래는 화려한 약력과 이력을 써 넣을까 고심하다가, 목하라는 이름은 이미 명불허전이라. 와 닿는 그의 시로 대신했다.
   


기다림

정지원

맑은 밤 고은 음악
차탁 펼쳐 홀로 앉아

나 한 잔 님도 한 잔
손 받혀 딸았는데

님 찻잔
줄지 않아
내가 마저 마시는.

 

김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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