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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은 감성이어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6.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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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이다. 우울해도, 기분이 좋아도 책장 앞에서 책등을 읽는다. 그러다가 제목이 가슴에 닿아서, 글씨체가 눈을 즐겁게 해서, 표지 색이 내 마음과 같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뽑아 든다. 엄지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바람을 일으킨다. 


그렇게 펼쳐진 어느 페이지에서 자석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작용해 나를 당기는 문장을 보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이 연필 안에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단어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 번도 말해진 적 없고 한 번도 가르쳐진 적 없는 단어들이. 그것들이 숨어있다." W.S 머원의 '연필'이라는 시 일부다.


어떤 물건은 필요성보다는 감성적 가치로 존재하는 예도 있다. 펜과 종이를 이용해 메모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연필, 만년필, 다이어리 같은 아날로그적인 필기구가 팔린다. 전구가 발명되었다고 양초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내 방안에는 형광등이 아니라 향초의 빛과 향이 방안을 채웠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는 디지털 음원의 시대에도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다. 김훈 작가처럼 필기구로서 연필이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연필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구이다.


연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나무 냄새.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어떤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연필을 깎아 주던 엄마의 얼굴이 그렇다. 엄마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천장에 걸린 전구가 만든 얼굴의 그림자도 함께 뒤척였다. 


마치 얼굴에 갇혀 떠나지 못하는 고단함이 일렁이는 듯했다. 그러다가도 필통을 펼쳐 놓고 자식들의 연필을 깎을 때면 칼날을 세운 도루코 칼에 섬세하고 빛나는 눈빛이 몰렸다. 연필 끝에서 기다랗고 동그랗게 말린 나무 조각들이 또르르 밀려 나오면 코끝으로 올라오는 옅은 나무 냄새, 그 냄새엔 엄마가 스며있다.
친구 집에는 분홍색 박공지붕에 아톰 캐릭터가 그려진 샤파란 연필깎이가 있었다. 검은 축을 중심으로 동그랗고 매끄럽게 깎인 연필이 부러워 연필깎이를 사달라고 졸랐었다. 


그러나 엄마는 말없이 달력의 지나간 달을 찢어 바닥에 깔고 뭉툭해진 연필, 심이 부러진 연필을 골라 정성껏 깎아 주었다. 
일정한 둘레와 길이로 나뭇결을 사각사각 걷어낸다. 그리고 연필심을 바닥으로 향하게 세운 다음, 칼등에 놓인 검지를 적당한 압력으로 밀어야 했다. 심이 패서도 너무 가늘어도 안 되는 힘, 흑심을 미세하고 부드럽게 벼린다. 바닥에 펼친 종이에 사사삭 밀린 흑연 가루가 가볍게 날렸다. 


심을 너무 뾰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뭉툭하게도 하지 않고 적당한 두께로 다듬는 것이 연필 깎기의 묘미다, 연필을 깎을 때 돌돌 말리는 나무 냄새가 있다면 심을 벼릴 때 미세한 떨림의 소리가 있다. 


새로 깎은 연필로 글씨를 썼을 때 필기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연필은 몸의 감각이 집중된다.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미세한 스침에 온몸의 감각이 수축과 이완을 넘나든다. 한겨울 새벽 첫차를 타고 가다 지구를 밀어 올리고 막 떠오른 해의 빛살이 차창 문으로 들어와 나와 처음 만나는 순간처럼. 미묘한 설렘이다.


연필을 쥐면 어린 시절과 아련히 연결된 따스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연필 쓸 일이 없었는데, 책에 밑줄을 긋거나 글을 쓸 때 연필을 쓴다. 연필과 종이가 마찰하며 내는 마른 낙엽 스치는 듯한 소리, 손에 쥐었을 때의 부드러운 단단함, 연필을 따라 올라오는 나무 냄새까지.


닳아서 소멸하는 아쉬움보다 흑점이 만드는 선과 느낌에 더 애착이 생긴다. 내재한 어떤 감정을 펜으로 영원하게 박제하는 일이 아니어서 연필은 더 좋다. 흐릿하고 여리게, 그리고 언젠가 필요 없어지거나 어쩐지 낯뜨겁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지울 수 있도록. 지금 생각해보면 내 문구 역사의 산업혁명 같은 샤프보다도 나무 냄새를 기억하게 하는 엄마의 연필이 내겐 명품 필기구였다.
연필로 완도신문 칼럼을 쓴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조화를 부리며 굳어 있는 생각을 서서히 풀어놓는다.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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