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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지 못한 노래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5.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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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시간 배경으로 5월이 조금 나오지만, 그렇다고 5월에 관한 글은 아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노래 한 곡과 어릴 적 친구, 혹은 젊은 날 가졌던 꿈 비슷한 것에 대한 글이다. 이 사실을 미리 밝힌다. 왜냐하면 지금은 5월이고, 마땅히 5월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차마 쓸 수 없어서이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대학 학번을 말하면 사람들은 앞에 수식어를 하나 붙인다. ‘전설의’ 학번이라고. 1980년에 우리 집은 광주로 이사했다, 자식 여섯을 대학에 보내려면 도시에 집을 사서 옮기는 편이 낫겠다는 게 아버지 판단이었다.

 

서울의 이름난 대학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워 경제적 부담이 없는 당시 2년제 서울교대를 카드로 내밀었지만 초등교사인 아버지는 딸을 교대에 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동생들의 학업도 걱정해야 했기에 고집피우지 않았고 넉넉한 예비고사 점수에 대한 미련도 바로 버렸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동아리를 기웃거리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광주 친구를 따라 합창반에 들어갔다. 그 친구는 고2 때 전남(광주 포함) 고등학생 학도호국단(그때는 그런 것이 있었다.) 수련회에서 만나 그 후로도 엽서와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선배들에게 간단한 오디션을 보았던가, 나는 메조 파트로 배정받았고 거의 매일 오후 강당에 모여 연습을 했다. 평화의 기도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6월 초 축제에서 부를 노래였다. 4부와 6부 남녀 혼성합창은 연습부터 웅장하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영혼이 담긴 악기이고, 합창은 그 악기로 연주하는 관현악이었다. 


  
가거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빼앗긴 조국이여, 잔인한 운명이여, 절망에 찬 소중한 추억이여
어느 날 무대의상이 왔다. 하얀 블라우스에 주홍색 쉬폰 치마. 처음 입어보는 긴 치마에 어른이 된 듯 조금 우쭐해졌다. 리허설을 위해 대강당 무대에 대열을 맞춰 섰을 때 지휘자와 악장 선배가 어두운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6월 축제와 공연은 영영 못하게 되었고, 우리는 이 리허설을 끝으로 당분간 만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는 관객 없이 울음 섞인 노래를 몇 번이고 불렀고, 몇 달 동안 교문은 닫혀 있었고, 주홍색 쉬폰 치마는 장롱 안에 오래 담겨있었다.


4년이 지나 졸업을 하고 고흥반도 끝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3월에 만난 고흥은 흙바람 부는 가난한 땅이었다. 아이들 맑은 눈망울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무엇인가 끝없이 부끄러운 나날이었다. 아이들은 해 뜨기 전 바다에 나가 김을 걷고, 먼 길을 걸어서 학교에 왔다. 밭에서 산에서 일하다 오는 아이들이 거친 손등을 옷소매로 감추며 연필을 쥐고 필기를 했다. 한겨울에 홑잠바를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며 공을 차던 아이들, 그들도 이제 중년을 넘기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길이 잘 닦여있지 않은 외진 곳이라 고흥에는 신규교사들이 많이 배정되었다. 초임교사의 눈에 비친 학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교무회의에서는 정작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에는 누군가의 방에 모였다. 저절로 협의회가 열렸다.  김치전이나 라면을 가운데 두고 토의 토론을 했다. 공교육이 대학 때 봉사했던 야학보다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이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우리는 서로를 선수라고 불렀다. 선생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해서였을까? 멀리뛰기나 높이뛰기 선수는 될 수 없지만 잘 가르치는 선수, 잘 살아가는 선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강 선수로 불렸다. 


그리고 그녀 김 선수,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도무지 힘든 내색을 않고, 그렇다고 쉬이 포기도 않고, 닥쳐오는 일들을 고요히 처리하고, 아이들과 교감하고, 때로는 고차원의 유머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는 내공을 발휘하는 선수였다.

 

그 해 그녀와 나는 한 방에 살았는데,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대학원 시험을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서울까지 가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완행버스로 비포장 길을 달려 읍에 가서 직행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노선이 있는 도시로 가야했다. 나는 곁에서 가슴이 설레었다. 내 역할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벗을 배웅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교육학을 전공하고 석사 박사가 되고 교수도 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미리 축복했다.

 

언제나처럼 녹음기로 음악테이프를 늘어놓고 새벽밥을 먹었다. 언제나처럼 자유를 위한 노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었다. 김 선수와 나는 마을길을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돌멩이들이 박힌 골목을 걸어 나와 아직 어둠에 싸인 채 잠들어있는 성당 공소를 지나고, 작은 다리고 건너고, 그렇게 대학원 시험을 보러 그녀는 갔다. 


아버지도 내가 대학원에 가기를 바라고 권했지만, 나는 동생들을 생각하여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FM 라디오를 켜면 종종 그 노래가 나온다. 낮고 힘차게 시작하는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때 대강당 무대에서 관객 없는 공연을 함께 하던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선배들 동기들은 모두 잘 있겠지, 편안하겠지.


해마다 5월은 온다. 누구나 그렇듯이 5월이 오면, 주먹을 굳게 쥐고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다. 부르지 않아도 귓가에 들리는 노래가 있다. 그리고 내게는 평화의 기도와 나부코의 아리아도 들린다. 
내 스무 살이 기억하는 노래다.   

 

 

강정희 강진대구중 교사
著 다정한 교실에서 20,00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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