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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잡고자 2만원 기금조성 고양이 20마리 사온 완도 동백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5.1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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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당시 동백리 새마을 지도자 전재진(현재 서울거주) 씨는 전남도 최남단인 완도군청 소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20여마일 떨어져 있는 외단 마을에서 새마을 사업을 통해 마을 발전을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 훈장 협동장을 받고 상사업비로 마을 공동창고를 신축하게 되었다.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동백리는 1974년 말 주민 호당 소득 164만원으로 ‘80년대 농가소득목표 140만원을 6년이나 앞당기면서도 24만원을 초과 달성했는데, 이는 새마을 지도자 전재진 씨를 중심으로 한 206가구 1,405명의 주민들의 각고의 노력 때문이었다.


동백리에서 새마을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은 새마을 선풍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72년보다 10년이 앞선 1961년 4월부터라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당시 주민들은 해마다 많은 식량을 앗아가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 기르기 사업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부녀회를 조직하고 좀돌이 저축으로 2만원의 기금을 확보한 후 20마리의 고양이를 사들였다.


효율적인 고양이 사육을 위해 고양이 호적부와 관리 규정까지 만들어 3년 뒤에는 온 마을이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당시에는 마을 내에 개와 염소는 기르지 못하게 하는 마을 자치 규약이 있었다. 염소는 녹화사업이 한창인 시기여서 염소 배설물이 식물이 자라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묘를 훼손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조상을 생각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아닐까!


또한 개는 옛말에 “견원지간”이란 말이 있듯이 개와 고양이(원숭이)는 함께 할 수 없는 속담? 또는 마을 내 청결을 이유로 키우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다.
두 번째는 18세부터 25세까지 마을 부녀자 20명을 선정하여 해녀 교육을 시켜 마을 공동어장에서 전복과 소라, 해삼을 채취하여 4,000여만원의 소득을 올리게 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다. 이를 기반으로 200여명에 이르는 해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1가구 1해녀의 시발점이었다. 


당시에는 마을 공동어장에서 해산물 채취는 제주 출신들의 해녀들이 거의 독점하다 시피 했는데 제주에 외갓집을 두고 있는 가구들은 대부분 해녀로서 왔다가 현지에 머물었던 결과였다.


세 번째는 미역양식업의 시작이다. 1969년도에 마을 자조금으로 미역 포자 배양실을 신축하여 1973년부터 연간 30만톤의 미역을 생산하여 1억 3,500만원의 어가 소득을 가능하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1970년 호당 416천원의 소득이 1972년에는 620천원, 1973년에는 1,032천원, 1974년에는 1,640천원으로 급증하여 도서 새마을 사업의 본보기기 되었다고.


이 외에도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해 양식선의 파손을 최소화 하기 위해 선착장을 축조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주민들은 지금도 눈물이 글썽여진단다.
현대에는 중장비가 잘 갖춰져 단시일 내에 축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리어커 하나 없어 거의 목도질로 축조를 해야만 했다. 작은 선창으로 불리어진 선착장은 길이 30여미터 높이 2미터로 추정되는데 마을 주민들이 울력(부역)으로 동원되어 순수하게 손으로 목도질로 이루어진 대 공사였다고. 현재 동백리 마을 주민들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리더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신 전재진 씨와 오직 마을 발전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다.


마을 지명 중 코지배기는 면적은 10㎡ 남짓 되는 곳이다. 이곳은 횟감의 황제 감성돔이 많은 곳으로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다. 
옛날부터 강태공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려로 아침도 드시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섰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아침상을 차려 코지배기까지 10리가 넘는 거리를 이고지고 배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 지명 중, 장사굴은 새머리 우측에 있는 금 솜날 내에 위치한 동굴이다. 동굴 내부는 장정 5-6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며 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문헌에는 남겨 있지 않지만 힘쎈 장사가 이 굴 안에서 생활하여 “장사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내리바탕은 경사도가 약 45도 정도되는데, 급경사이기에 내리바탕이라고 칭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곳은 속칭 “눈물고개”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천수답이고 모든 운송수단이 지게 또는 머리에 이고 운송을 하였다. 내리바탕 아래에는 동백리에서 유일하게 쌀이 생산되는 천수답이 꽤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곳에서 지은 농산물을 이고 지고하여 내리바탕을 오르게 되면 힘이 들어서 또는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하여 “눈물고개”라 불렸다 한다.

 

후에는 새머리에 초소가 있었다. 한 때 이 곳은 현역병, 방위병(단기사병) 전경 등이 국방의무를 했던 곳이다. 신병들이 자대를 배치 받아 초소로 이동하면 중간에 이 곳을 지나가게 된다 선임병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병들의 군기를 잡는 곳이어서 신병들의 눈물과 한이 설였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리바탕은 그대로인데 눈물과 한은 없다.


(계속)
유재철 이장
최광윤 과장(동백마을 출신 공무원)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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