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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철 군수가 하는 말, 김성칠 형님과 오성수산이 . . .”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2.04.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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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한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할 수 없다며 멈추는 것. 반면 내려놓음은 할 수 있지만 비우는 마음으로 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멈추는 것.
멈춘다는 측면에선 같은 말인 것 같지만, 포기는 본성에 부합하는 반면 비우는 건 본질과 부합해 둘 차이는 하늘과 땅, 천양지차다.


포기는 현실적인 아쉬움의 결정인 것이고, 내려놓음은 깊은 성찰끝에 내릴 수 있는 결정으로써, 본성이란 내가 기쁘기 위해 너를 희생시키는 이기성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본질이란 너를 위해 내가 희생해 너와 나 모두를 기쁘게 하는 환희의 일로써, 옳은 일을 할 때 느끼는 기쁨과 바른 길을 갈 때 찾아오는 평안이 그것. 
즉 본질이 주는 환희, 이타(利他)다.


그 환희 속으로 걸어가기만하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영원한 시간이 되는데, 본질보다 궁극에 있는 실존이란 그렇게 탄생한다. 나의 마지막이란 나의 마지막 순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결정짓는 삶으로 아름다운 인생이란 지금 이 순간을 나의 마지막이라 사는 것이다.

 

지난 15일, 완도읍 장날.
본사를 방문한 청산도 지리마을의 김성칠 씨 가족.
작년 이 맘 때도 뵀던 얼굴.
어머니의 말이 이번에도 작년처럼 신문 대금을 내러왔다고 했다. 계좌이체나 지로를 이용하면 편리할텐데, 굳이 신문사까지 방문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만원짜리 몇 장을 꺼내놓으며 하는 어머니의 말이 "아버지가 연로해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듣지도 못하는데, 완도신문만은 꼭 챙겨보고 찾드랑께라"


"20년을 훨씬 넘게 봤제라!" 
장날이라곤 하지만, 청산도에서 신문사까지 방문한 송구함이 느껴져 무엇이라 표시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영수 처리한단 글을 쓴 쪽지를 건네줬다.
왜, 완도신문을 구독하는지를 묻자 아버지의 말은 "이경국 사장일 때부터 완도신문을 봤지라" 


옛날엔 검찰 수사를 받았던 완도신문의 이야기,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돕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돕는 모습. 요즘 나오는 신문을 보면 똑같은 기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완도신문만은 똑같은 기사여도 다르게 쓰여 있었고, 지난 시간 사람은 많이 바뀌었는데도 완도신문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을 어머니가 대신하는데, 예전에 완도신문사에 오면 시골점방처럼 낡아 허름해 천정에서 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모양은 허름해도 그 안에는 참다운 것이다 있다며 거짓을 이야기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냐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변함없이 그 가슴과 어깨와 머리가 진실과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완도의 정신이 아니겠냐"고.
아버지는 청산면 지리에서 어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자연산 전복 치폐를 해녀들에게 사와 양식하던 그 시절이라고 했고.
하루하루 일기를 써가며 전복이 무럭무럭 커갈 때 전해오는 그 기쁨이란 정말 행복했다고.  

 

뒤늦게 받아 본 아버지의 일기장에는 <1986년 7월, 전복 약 70여일만에 투이하였으나 먹이는 전혀 없다. 가두리가 1년이상 되어 이물질이 많이 붙어 조류 소통이 되지 않아 상당한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전복은 살아 있다. 많이 건강하게 보인다. 총 16개의 전복과 3개의 소라> 하루의 일과와 전복을 관찰하는 모습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었다.


언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냐고 묻자, 성칠 아버지는 갑자기 신우철 군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신우철 군수와는 신 군수가 어촌지도소에 근무할 때부터 막역했다고. 
자연산 전복 새끼를 사와서 미역줄에 달아 광주리와 초롱 속 묶어놓고 콩나물을 키우듯 키웠는데,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앞으로 다가 올 완도전복의 미래까지 논했다고.  


나이가 들고 신우철 소장 또한 정치에 입문해 군수가 된 어느 날, 전복 생산자 40여명이 함께 모여 있는데 갑자기 신우철 군수가 하는 말이 "청산면 김성칠 형님과 노화의 오성수산이 완도전복의 선구자였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당시엔 지금처럼 전복 치폐장이 없어 바다일을 하는 해녀들이 전복 치폐를 잡아오면 그걸 받아다가 키웠다고. 

 

당시 전복 치폐값은 1마리에 5백원이었고 전복값은 1킬로 10만 5천원 정도였단다.
그렇게 젊은 시절 전복 수중 양식에 성공했고, 45살에 2천만원 융자를 받아 집도 짓게 되었다고. 
전복양식을 성공한 후엔, 읍 망남리 김광옥 친구에게 전복양식을 추천했으며 그때 중학교 동창 3~4명이 함께 전복양식을 시작했는데 태풍이 불어 실패도 맛봤지만 이후 돈도 벌었다고 했다.


수협 풍어 공동체 위원장을 지내면서 일본 견학을 다녀오는가 하면 가두리 양식에 대한 연구도 많이했는데, 당시만 해도 가두리는 바람에 잘 견디지 못해 바람에 잘 견디는 가두리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고.


조용히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아들 김호 씨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요즘 바다는 어패류 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판로마저 여의치 않다.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못하면서 힘든 일상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어장을 떠나고 있다. 값싼 외국산 수입물에 밀려 제값을 받기 힘든 유통구조다.가업을 잇겠다는 핏줄도, 젊은이도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다"고 했다.


그러며 "바다환경은 이렇게 변했는데, 변하지 않는 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났고, 그 냄새는 지금도 난다"면서 "그 바다 냄새가 한편으론 싫으면서도 한편으론 참 좋았는데, 아버지의 이름에선 그래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늘 바닷물과 땀이 엉켜 있는 아버지의 느낌은 어릴 때도 지금도 선망이었다"고.


"지금은 연로해 노환까지 겹쳐 예전같은 패기는 없으시지만, 안개가 껴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라도 들려오면 바다 하나로 삶의 터전을 찾은 아버지와 우리 전복, 김 양식을 하는 어부의 숨소리처럼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전해온다"고 했다. 
시대와 시대를 건너오는 일이 어디, 이름을 떨친 영웅들의 이야기뿐이겠는가! 그 시대를 살아 온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의 장엄한 숨결과 정성 어린 마음 하나 하나.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 쯤은 그들이 겪어온 외로움과 절망에 비하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를! 또, 그 고독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투쟁했던 그들의 절망은 우리가 겪는 절망보다 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었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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