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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스타일, 북극성 캐리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4.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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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집에 가시면 그 캐리어 사진 찍어서 좀 보내주세요, 보고 싶어요.” 
“알았어요. 그냥 평범한 캐리어인데…. 두 개 중 하나는 지금도 갖고 있어요.”


윤 선생은 오래 전 전남에서 경기도로 전출해, 성남의 중학교에서 수년간 근무하다 다시 고향으로 온 수학교사다. 성남시는 당시 2016년부터 ‘교육의 기본은 읽기’ ‘성남은 읽습니다’라는 주제로 성남형 독서교육 ‘Book극성’을 전개했다. 가정과 학교, 사회가 함께 책을 읽자는 취지로 2020년까지 연차별 계획을 세워 시청에서 시작한 독서 프로그램이었다. 각급 학교에서 선도교사 250명이 참여하여 연수를 받고 협의를 하며 진행했는데, 그 과정이 가히 ‘경이로웠다‘고 윤 선생은 회고했다.


시청에서 여러 차례 열린 협의회는 교사와 실무진이 마주앉아 자유롭고도 진지한 분위기였는데, 독서와 교육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토의하여 가치와 의미를 다지고 실현가능한 모든 방법을 열어놓고 모색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본질에 충실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실적이나 성과에 연연하지 않았고, 절차와 업무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단순하고 수월하고 신속하게 지원했다. 관리나 전시를 위한 ‘행사’가 아니고 학생과 교사의 마음에 스며드는 내실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윤 선생은 말했다.


책을 도서실에 보관해놓고 학생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학생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읽고 토론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수업시간에 책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교사들은 모두 각자가 이동도서관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시청에서는 모든 교사에게 엄선한 양서 200권과 여행용 캐리어 두 개씩을 마련해 주었다. 


세상에! 돌돌돌…. 교사 250명이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 되어 200권의 책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복도를 걸어 아이들이 있는 교실로 가는 모습을 그려보자.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때 성남시장은 이재명님, 그는 협의회에 항상 참석해서 교사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메모했으며 회의결과는 지체 없이 바로 반영되었다. 놀라운 점은 실적 보고를 할 필요도 없고 오로지 아이들이 책을 읽도록 돕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책과 캐리어는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구입한 것이지만, 관리하거나 보존해야하는 업무 대상이 아니라 잘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성남스타일, 이재명 캐리어’, 나는 그렇게 불러본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10대에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 절실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사에게 무엇을 지원해 줘야 하는지, 교육현장에 무엇이 필요한지가 자명하게 보일 것 같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담긴 따뜻한 시선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더하고 정성스런 지원으로 교육전담기관에서보다 더 교육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이다.

 

훌륭한 프로그램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과 교사도 함께 성장하게 한다. ‘Book극성’ 프로그램 이야기를 전해 듣고 휴대폰으로 전송해준 캐리어 사진만 보았을 뿐인데도 나는 가슴이 뛰며 영감이 떠오를 듯 설렌다. 좋은 책과 책을 읽을 만한 환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교육의 멋진 조건이다.

 
나는 1994년부터 5년 간 육아휴직을 하고 두 아이를 키웠다. 내 아이를 잘 키우고자 무급휴직을 해서, 그림책을 읽어주고 수영과 스케이트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치며 5년을 지냈다. 정해진 기간이 다 하여 복직을 해서 학교에 가 보니 학교 도서실에 책이 없었다.

 

녹두색 하드커버에 세로 2단으로 흐릿하게 인쇄된 ‘적과 흑’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전집과 자주색 표지에 금박이 입혀진 ‘조선왕비열전’만이 유리문 달린 깊은 서가에 먼지를 이고 꽂혀있었다. 나는 3월 월급 중 150만원을 내어 창비출판사 아동문고와 산하출판사 어린이문고를 샀다. ‘몽실언니(권정생)’, ‘나도 쓸모 있을 걸(이오덕), ’연오랑 세오녀‘ 등을 녹색 플라스틱 우유박스에 책등이 보이도록 두 줄로 세워 담아서 교실로 들고 다니며 국어시간마다 대출반납을 해주며 읽게 했다. 하교 시간 우리 반 종례가 길어지면, 다른 반 아이들이 복도에 앉아 책을 읽으며 같은 마을 친구들을 기다리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 말로 할 수 없이 흐뭇했다. 나중엔 내 아이들이 자라서 그 책을 받아 읽었으니 내 아이와 제자들은 책 동문이 된 셈이다. 


성남시 독서 캐리어에 나의 녹색 우유박스가 오버랩 되었다. 도서구입비가 학교운영비 4%로 책정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다. 지금은 학교마다 책을 살 예산은 충분하다. 다만 휴대폰과 또 다른 그 무엇인가로 아이들이 너무 분주하여 책을 읽을 시간과 마음이 부족하여 아쉬울 따름이다.


교육, 복지, 노인, 보건, 문화예술 등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Book극성’과 같은 세심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방방곡곡이 환해지는 꿈을 꾸어본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와 본질만 오롯이 남은 진짜 행정, 행정을 위한 행정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행정이 실현되는 벅찬 꿈을 꾸어본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그냥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너무도 잘 안다. 우리가 꿈만 꾸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데 그런 평등하고 밝고 바른 세상이 직진을 해서 우리 앞에 떡하니 당도하지는 않는다.


혹한을 건너 봄이 오듯, 어둠을 젖히고 아침이 오듯, 환한 세상이 오기는 올 것이다. 이성부 시인의 시 ‘봄’에서처럼 ‘어디서 한눈도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다가, 눈 비비며 더디게, 먼 데서 이기고’ 올 것이다. 우리 애간장을 좀 녹이고, 장한 모습으로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다. 씨앗을 갈무리하고 땅을 다지며 기어이 오고야 말 봄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데 선생님, 2층 3층 계단으로 그 무거운 캐리어를 어떻게 들고 다녀요?”
“아, 거기는 모든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강정희 강진대구중 교사
著 다정한 교실에서 20,00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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