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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와 라르고 그 중간의 바람이었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3.3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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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끝에 모서리가 없다. 둥글게 닿는다. 아무 데서나 풍경의 정류장이 되고 싶은 날이다. 
풀렸다. 
날이 풀리고 바람이 풀렸다. 


아파트 담장을 삐져나온 개나리 봉우리가 부풀어 올라 터진다. 노란색 한 올을 당겨 풀기 시작하면 곳곳에서 허둥지둥 봄이 풀린다. 풀어헤친 봄들을 뜨개코로 엮듯 갓 태어난 꽃눈이 봄을 엮는다. 덩달아 따듯한 바람이 살아난다.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뒤섞인 봄은 그렇게 구석구석 비집고 들어간다. 여기저기서 함부로 꽃을 피워댄다. 자기들끼리 뭉쳐있던 흙이 푸석하게 내 체중을 받는다. 바람까지 흙 맛을 품기 시작하는, 봄맛을 제대로 맞이하러 아파트 가림막을 벗어난다.


종점을 몰라도 되는 시내버스에 무작정 올라탄다. 달리는 틈과 틈으로 창문을 연다. 버스 안 공기가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차창 밖으로는 물을 들이켜기 시작하는 수양벚나무와 포플러 배롱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집단 거주지인 아파트가 스쳐 지나간다. 풍경 사이사이로 간혹 물줄기가 나타났다가 뒤로 밀려난다. 창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눈꺼풀로 눈동자를 절반쯤 덮고 바람 온도를 점검한다.


듬성듬성 비어있던 세상을 채우는 풍경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그렇다. 봄은 하나둘 살아나는 것들이, 자라는 것들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물들이며 채워지는 경로가 내게서 머물다 간다. 느리게 느리게. 아다지오처럼.


보통리 저수지 풍경이 반나절 정도만 내게 머물 수 있도록 수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잘 꾸며진 물가를 걷고, 걷고 걷다가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를 들어갔다. 
부담스럽게 탁 트인 통창으로 저수지가 들이친다. 바람이 강을 건너는 풍경이 내게로 온다, 물결은 경이롭게 빛을 뿜어낸다. 나뭇가지들이 상공에서 내려와 창문 모서리 쪽에 걸려 있다. 줄줄이 드리워진 실버들의 야리야리한 가지 사이로 봄바람이 헤집고 들어왔다. 바람의 자취 따라 가위로 마름질한 듯 버들 이파리가 파르라니 돋아난다. 바람의 손길에 감탄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봄꽃보다 한발 앞선 바람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더라도 기억은 더디게 갔으면.


사람의 마음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저수지 주변을 걷는 발걸음도, 카페 안에서 자분자분 속삭이는 사람도 겨울보다 많아졌다. 옆 테이블에서 내 또래의 여자들 목소리가 들린다. 


다소 부푼 억양에서 봄이 느껴진다. 그중 한 사람이 겨울을 뚫고 나온 맛을 자랑한다. 어제저녁 한데서 캔 냉이 된장국을 온 가족이 후루룩 마셨던 일을 맛깔스럽게 풀어놓는다. 또 한 여자는 주말농장에 씨앗 뿌리며 맡았던 흙냄새를 뿌려 놓는다. 싹도 올라오기 전부터 그녀의 식탁은 갖가지 채소가 올라오고 있다. 귀동냥으로 듣는 소리가 어쩜 이리도 입맛 다시게 하는지 집에 들어갈 때 손에 들고 갈 찬거리가 말풍선처럼 머리 위에서 떠다닌다.


냉이를 캘까. 달래를 캘까. 일찌감치 뾰족 올라와 노인의 눈에 들켜 저잣거리에 펼쳐진 원추리 한 바구니를 데쳐볼까. 
아니면 쑥 한 움큼 뜯어 된장 물을 풀어볼까. 머릿속에서 구르는 생각만으로도 차린 것 없이 풍성해지는 입맛이다. 지천으로 돋는 여린 풀들의 맛을 사다가 봄맛을 무쳐야겠다. 그리하여 겨우내 김장김치에 질려 있는 혀의 미뢰를 깨워야겠다.


시간이 되면 되는 데로 시간이 안 되면 안 되는 데로, 특별히 보고 싶은 것도, 보아야 할 것도 없다. 그저 봄바람이 가리키는 이정표 따라 현관 밀고 나와 걷는다는 것이, 어떤 곳으로 가본다는 것이 마치 삶의 진행형처럼 느껴져서 좋다. 나 자신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반나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풋풋하게 돋아난 풍경들이, 잠시 정류장처럼 내게서 머물다 갔던 모든 순간이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속도로 내게 온전하게 스며들었던 그때. 온전하게 풍경의 정류장이 되었던 때가 나에겐 모든 감각을 깨우는 봄맛이다.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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