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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 소리가 자막처럼 지나갈 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2.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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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한 하늘이 수평으로 들어온다. 구름 한 점 품지 않고 미동도 없이 파랗게 누워 있다. 내 눈도 얕은 푸름에서 초점을 흐린다. 혼자 집에 있다는 건 쓸쓸하기보다는 나조차 소멸한 정적이다. 순간적으로 정적을 삼키는 건 소리다.

 

소리는 비로소 나의 실재를 알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주변으로부터 반복해서 탁 타닥 탁하고 들린다. 키보드 타이핑 소리인 듯 아닌 듯. 혼자 있는 집에서 나는 아무 행동도 안 하고 있으니 소리는 환청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내가 여기에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타이핑 소리가 정적을 휘저으며 공간에 고인 모든 정물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많은 소리가 나와 함께 움직이고 숨 쉰다. 그것들은 올가미가 되어 나와 뒤엉키기도, 빗소리처럼 또는 노래처럼 운율 위에 나를 태워 놓기도 한다. 나를 가만히 있게도, 움직이게 하기도 하는 소리. 오늘은 기억에 고인 타이핑 소리가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로 한 날이다.


거쳐왔던 직업 가운데 제품 개발부에서 서류를 담당한 적이 있다. 총무과와 여러 부서를 지나쳐 문 하나를 밀고 들어가면 별도의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모델이 쉼 없이 출시되던 때, 신모델 개발 관련 데이터가 모이고 이력이 만들어지는 공간. 관공서 행정실 같은 각진 네모 분위기였다. 그곳은 몰아치는 타이핑 소리와 간혹 정제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온 내면의 소리가 낮은 진동으로 십여 명의 직원들을 압도했다.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모니터 그리고 키보드와 다를 바 없이 하나의 부품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내가 하는 업무도 그 공간에서 근무시간 동안 빈칸에 숫자와 문자, 기호를 번갈아 가며 태어날 제품에 대한 사실들을 채우는 일이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한 사람의 인적사항을 기록하려는 자연스러운 행정 직원의 관성 같은 것이었다. 


모니터 밖의 세상은 그들에게 무의미하다는 듯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조합을 보는 눈빛에 흔들림이 없다. 신제품은 시간과의 전쟁이었으니 누적된 피로는 당연했다. 다만 몇 번의 숨을 내뱉고 들이키는 동안 눈을 감으면 타이핑 소리가 기묘하게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함석지붕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빗방울이 지면에 찍어대는 해독할 수 없는 글자를 응시하며 들었던 소리. 이승과 저승의 그 중간쯤에서 듣는 오르골 같은 소리가 그러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까무룩 잠들어도 좋을. 


내가 타이핑 소리를 좋아한다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한 편의 영화가 시작일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외화에서 금발의 여자가 타자기를 치는 장면을 봤다. 아니 들은 것이다. 그리 밝지 않은 우중충한 사무실이었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가 찍힐 때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는 듯 따듯한 소리, 그 여배우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소리를 만들고 싶은 수단으로서의 글. 조도가 낮은 스텐드 불빛으로 글자의 소리가 스며드는 풍경, 그 앵글 안에 특별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세상은 타이핑 소리를 더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변화 속도를 급하게 따라가며 키보드 자판 소리에서 그날 밤의 타이핑 소리를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함께해서 익숙하지만, 타격감은 건조한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 끝이 자주 닿았던 자판의 키스킨이 얼룩져 도드라져 보인다. 노트북과 연결해 사용할 요량으로 며칠 전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여러 번 수술을 거친 팔꿈치가 노트북 자판을 누를 때 불편해져서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 덕에 난 아주 오랜만에 타이핑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자판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손가락들이 낯선 각도에서 리듬을 탄다. 


특유의 소리는 리드미컬하고, 물 고인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만든 무늬처럼 자판의 반동은 부드럽다.
소리와 함께 살아낸 오늘이 영화의 자막처럼 나를 통과한다. 가만히 느낀다. 
하늘에선 비행운이 생각처럼 지나간다. 나는 가만히 본다.
무언가가 내 영혼을 살며시 흔들고 있다. 
소리였다.

 

 

김지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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