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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모든 마지막 싸움은‘섬’에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2.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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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섬에서 처음으로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진도 고려국, 그 주변 완도에서 남해에 이르는 각섬들과 탐라국까지 합세한다. 노예로 살기보다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만든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몽골에 굴종하면서 살기를 거부한 것이다. 몽골과 친족관계가 되버린 고려왕족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장보고의 청해진권역 강진의 고려청자를 중국 송나라 등과의 무역을 통해 재력을 축적한 신흥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김부식과 묘청의 싸움에서도 볼 수 있듯, 신라기반 주류기득권과 청해진 신흥세력의 싸움이 독자성과 주체성이 강한 고려 무신정권을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외부의 강력한 몽골이라는 오랑캐가 더해지면서 100년간의 통치를 합리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주적인 고려의 정통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존립기반이 되었던 정통성과 자주성이 몽골에 의해 훼손되자 이에 항거한 것이다. 


첫째가 몽골에 침입해 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것도 장보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전통적인 우리의 대응전략의 기본은 청야입보(淸野入堡)였다. 들판에 먹을 것이나 기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태우거나 제거해 버리고 산속의 성(城)이나 험한 지역에 보(堡)를 만들어 적들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농성(籠城)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삼국시대에서도 외부 침략이나 또한 일본 왜구의 침탈 때에도, 고려시대 거란족의 침입에서도 가장 널리 사용된 병법의 하나였고 사실 재미를 본 전쟁전략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섬으로 피하는 입도(入島)전략이었다. 바다가 천혜의 성이자 해자로서 기능했다. 감히 몽골이 생각지도 못하는 전략으로 고려는 1231년부터 1273년까지 무려 42년을 섬을 기반으로 몽골과 싸우면서 버텼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장기농성이었고 전쟁이었다. 몽골은 11번이나 대규모 군사를 보내 고려를 없애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바로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을 신라 민애왕이 어쩌지 못한 것도 장보고의 본진이 청해진이라는 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민애왕의 가장 큰 정적이 청해진 섬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기에 당시 수군이 없었던 신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본다. 민애왕은 가장 먼저 김우징 신무왕을 처치해야 했지만 완도가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방치하다가 결국 장보고의 5천 기병에 10만명의 신라정부군이 대패했던 것이다.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신라라면 김우징을 제거하기 위해 청해진으로 보낼 수도 있었으나 바다라는 천혜의 성(城), 자연해자인 바다로 둘러쌓인 청해진, 그것도 강력한 당시로서는 최첨단 선박을 보유하고 대양항해를 통해 수많은 뱃사람들을 가지고 있던 노련한 장보고와 대결할 입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이전까지는 섬은 거의가 중앙정부의 유배지로 이용되고 있었을 뿐, 섬의 가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섬의 유배지 전략은 이후 근대식 형제도가 정착하기 전인 1910년까지도 지속된다.


그래서 고려는 장보고의 승리를 보고 몽골이 침략하자 강화도로 천도를 결정했을 것이다. 섬으로 들어갔기에 몽골의 침략에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었으면 몽골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점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에만 머물러서는 앞으로의 희망이 없었다. 벗어날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몽골에 더욱 효율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진도로 천도를 예정했다. 진도와 완도는 무신정권의 강화도를 오래 버티게 해준 경제적 후원처이기도 하였다. 바다를 통해 강화도에 식량 및 물자를 보급받았기에 강화도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여몽합방이 되고 무신정권의 실권자들은 살해되고, 삼별초가 해산되자 의거한 것이다. 1270년 6월 1일의 일이다. 강화도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진도로 출발한 것이다.


그후 섬은 중앙지배권력에게는 무서운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섬으로 피하거나 혹은 섬에 자리를 잡으면 함부로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눈에 가시처럼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삼별초 항몽의거 이후에 중앙집권층들은 강력한 공도(空島)정책을 취한다.

아예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특히 진도 고려국의 강력한 항몽전쟁 이후에 서남해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강력한 폐쇄정책을 실시한다. 강화도에서 남해까지 삼별초가 거쳐간 섬은 더욱 심하게 단속하였다.
진도도 또한 완도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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