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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김동식
전남문화관광해설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1.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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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서양 철학자)의 애매도형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무엇을 그린 그림이냐고 물으면 ‘오리’라고도 하고, ‘토끼’라고도 한다.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는 토끼 그림인지, 왼쪽 방향을 보고 있는 오리 그림인지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도형은 변하지 않는데 그 그림은 마음의 시선에 따라서 멋대로 오리가 되기도 하고 토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그림을 오리-토끼로 동시에 인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기를 써도 오리로 보일 때에는 토끼 모습이 사라지고 토기로 보일 때에는 오리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오리도 되고 토끼도 되는 양의성을 지닌 것인데도,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에 좌우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 차이에서 의미와 여러 가지 틀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처럼 다의적이고 애매한 것인데도, 우리는 항상 ‘예, 아니요’의 양자택일로 답변해야 하는 법정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해 보자. 어른들은 아무 일도 없이 잘 놀고 있는 아이를 붙잡고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라고 묻는다. 엄마 아빠가 똑같이 좋다고 하면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만들어 아이를 압박하기도 한다. 말이 쉽지 오리-토기의 그림에서 보듯이 다의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관점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자유이면서도 때로는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된다. 쏠린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이의 영원한 멘토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을 보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조언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냐’를 ‘나’로 바꿔 보라는 거다. 그리고 그 ‘나나’가 ‘도도’로 진화하여 수동적인 데서 능동적인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도시생활에서 패배한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 “모두 다 때려치우고 시골이나 가서 농사나 짓자”라고 할 때의 그 ‘~나 ~나’이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생활이다.

그러나 패기 있는 젊음과 희망을 지닌 젊은이들은 ‘나나’가 아니라 ‘~도 ~도’라고 말한다. 일‘도’하고 놀기‘도’하고, 도시‘도’ 농촌‘도’ 모두 자기 생활공간 안에 포함시킨다. 사자성어로 말하면 이자택일(二者擇一)에서 양자병합(兩者倂合)의 세계로 가는 것이 ‘나나’에서 ‘도도’로 가는 삶이고, ‘Win-Win’의 상생원리라고 하였다.


어떻게 할까요. 여름밤 아버지는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하고, 어머니는 모기 들어온다고 창문을 닫으라고 한다. 문을 닫으면 아버지가 호령하고 문을 열면 어머니가 운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어느 한 편을 들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럴 때 유리한 어느 한쪽에 서려고 한다면 오랫동안 우리가 상처 입은 그 줄서기의 비극을 재연하는 것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골육상쟁(骨肉相爭)하던 그 비극 말이다.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은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창조하는 젊음(여기서 젊음은 끝없는 열정, 지치지 않는 탐색, 미지에 대한 호기심, 희망, 아름다움 등을 말한다)은 줄을 만든다. 망창을 만들어 다는 것이다.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는 막아주는 이 방충망을 창조하는 것. 그것만이 ‘나나’를 ‘도도’로 바꿔주는 희열의 역사를 눈앞에 펼쳐줄 것이다.


하나의 답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답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정답이 아닌 자신만의 답을 찾는 창의력을 발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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