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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유배 온 이충무공전서의 ‘윤행임’ 노비제 타파였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1.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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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조7년 1398년 6월 8일자 기록을 보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이다.


무릇 노비(奴婢)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五升布) 1백 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5백 필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거슬리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은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인 자는 4백 필로 하고,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하여 매매를 논정하기로 하고, 이를 일정한 법으로 삼게 하며, 그 현재 도망 중에 있는 노비의 역가는 매 1명마다 1개월에 오승포 3필로 하고, 연월이 비록 많더라도 그 값에 지나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는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속살이다. 그것도 자국민이 자국민을 가지고 가격까지 국가에서 책정하는 야만의 역사이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인 것이다. 이에 조선을 연구한 미국인 제임스 팔레(James Bernard Palais, 1934~2006) 교수는 “같은 민족을 대를 이어 노예로 삼는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한국학 전문가인 팔레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다.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의 노비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야만적인 제도다. 신라 골품제도와 고려의 악습을 물려받은 조선의 세종이 성리학을 공부한다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만들어내면서 노비의 불법적인 증가가 시작되어 조선사회의 40%까지 노비의 숫자가 치솟는다. 자국민이 자국민을 부려먹고 노예로 부리는 그것도 부족하여 마구 자체적으로 생산해내고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나라의 성리학자들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한글을 창제하고 지금 서울 광화문광장에 딱하고 버티고 있는 세종대왕의 숨겨진 부끄러운 모습이다.

 

당시니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서 잘못된 것이니 우리가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고 고쳐야 한다는 각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는 세종대왕 덕분에 조선의 노비의 숫자는 이후로 엄청나게 증가한다. 양반 15%, 양민 50%, 노비 35%의 사회가 조선사회였다. 이 비율은 사회변동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그 숫자의 의미는 신라골품제에서나 고려사회에서나 조선에서나 역시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2080 사회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세종이 만든 노비종모법은 악랄한 법이었다. 어머니가 종이면 자식들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노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종모법을 시행한 이유도 교활했다. 양반의 분탕질로 태어난 첩과 노비의 자식들이 양반가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노비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관리하려는 악랄한 흉계가 숨겨 있는 그것도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는 세종이 소위 이기(理氣)를 찾고 선악(善惡)을 논하는 성리학자들과 벌인 광란의 야만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노예지국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노비를 세는 단위는 가축을 세던 단위와 다르다. 양인을 세던 단위는 명(名)이었지만, 노예를 세던 단위는 구(口)였다. 물론 그런 노비제도를 개혁해보려고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1895년까지 공식적으로 노비제도를 타파하지 못했다. 완도로 유배왔던 윤행임 또한 노비제를 타파하려고 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완도를 빛나게 하고 있는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전라도가 자랑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바로 석재 윤행임(碩齋 尹行恁, 1762∼1801)이다. 대부분이 그의 업적을 모른다. 그러나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여 이순신을 오늘에 되살려 낸 인물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정조의 명에 의해 자료를 모으고 분류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윤행임은 이순신을 역사의 전면에 다시 되살리고 광주의 김덕령과 임경업을 역사에 등장시켰다. 


또한 그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을 말하고 있다. 비록 그가 취사선택 하였지만, 가장 전라도를 잘 표현한 말로 “약무호남시무국가”란 말을 기록에 실었다. 이 말이 없었다면 전라도의 진실은 감춰질 수도 있었을 것. 보편적 가치관을 가진 윤행임의 선견지명 덕분이다.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그도 평생 ‘국가’만 있었을 뿐 변변하게 친구 하나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말이 됐다. 동족이 동족을 노비로 삼고 인간이 아닌 물건 취급하여 사고 파는 야만적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그는 이순신을 다시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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