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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사람 김원봉 의열단장과 완도 항일의병이 맺어 준 인연

완도군-밀양시, 지역경제 활성화 … 우호협력도시 협약 체결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11.26 10:54
  • 수정 2021.11.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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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과 염화 암살에서 김원봉으로 분한 조승우.
약산  김원봉과 염화 암살에서 김원봉으로 분한 조승우.

 

나는 원한다. 조국이 날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러시아 시인 미야꼽스끼의 시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북한 정권의 고위직에 오른 김원봉을 치켜세우자 보수진영은 호국영령을 추념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반한다며 거친 이념 공세를 펼쳤다. 자유한국당의 공천을 2번이나 받아 당선된 박일호 밀양시장 또한 그러한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박 시장은 고향에서 그를 기리지 않으면 어디서 기리겠냐면서 "사명대사, 김종직과 김원봉은 밀양의 영웅"이라며 김원봉 생가터를 사들여 의열기념관을 열었다.


김원봉 "나는 군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는 농민의 군대이다. 여러분과 같이 오줌통도 지고 김도 매고, 씨도 뿌리겠다. 나는 일개의 군인으로 농민운동을 지지한다. 대표 여러분이 굳게 싸우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남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 나이 14살인 1911년 일본 천황의 생일에 나누어 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려 퇴학을 당했던 항일정신이 투철한 사내아이. 평화적인 방법만으로는 해방이 쉽지 않다는걸 알았던 그는 무장 투쟁을 통해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19세에 군사학을 배우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무장 토쟁의 기본을 배웠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그해 11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요인암살, 중요기관 폭파로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현상금이 100만원으로 현재로 치면 320억원의 거액,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엔 일제시대보다 더한 수모를 겪게되는데,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남북간의 분단을 걱정했던 그의 행보는 빨갱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고, 무자비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잡혀가게 된다.
1947년 3월 남로당 파업 연류와 관련해 체포된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바지도 못올리고 끌려가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는 등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일본군을 덜덜 떨게 한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 경찰출신에게 뺨을 맞고 온각 조롱에 모욕을 당해 풀려난 뒤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했고, 김구과 김규식이 돌아올 때 그는 북한에 남았다. 그 만큼 친일 경찰에게 당한 수모는 크나 큰 상처였던 것.


북한에서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 등 고위직을 수행했으나 1958년 북한 김일성은 김원봉이 장졔스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숙청하고 만다. 이 월북사건으로 인해, 그의 이복형제 등 가족들은 한국전쟁 때 몰살당했으며, 겨우 살아남은 형제는 옥살이를 전전하며 피폐한 삶을 살았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의 멘토이자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 또한 이번 협약식에 참석했는데, 송 신부는 "약산 김원봉과 그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펼쳤던 사람이 바로 완도인이었다"고 했다.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과 항일 3대성지인 완도와의 인연은 그래서 특별하기에 신우철 군수에게 이를 제의해 성사된 협약식.


그런데 그날이 하필 전두환 씨가 죽던 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송기인 신부의 말은 "국민에게 비통한 슬픔을 준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과 없이 화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독재와 압제에 의해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약산 김원봉의 삶처럼 신부님 이전에 혁명가의 면모를 보이는 송기인 신부, 저 백열하는 별빛은 깊고 깊은 내면 속 산란하는 파동의 입자로 결코 마르지 않는 혁명의 본질로써 가장 낮은 곳에서 질서 있게 배열해 반짝이고 있었다.


김형진 기자

 

 

송기인 신부님이 맺어 준 인연, 어쩜 두분이 똑 닮았을까?

 

밀양(密陽). 한자로 풀어보면 비밀스러운 햇볕, 멋스럽다. 
밀양아리랑과 영화 밀량 정도만을 기억하는 곳이었는데, 이번 상생발전 협약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 이름처럼 비밀 하나를 간직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경부선 철도가 시의 중앙부를 관통, KTX가 정차하고 삼랑진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고 있는 경전선 철도가 분기되어 나가며, 또한 신대구부산고속도로 개통과 국도 24, 25호선으로 부산, 대구, 울산, 창원 및 창녕으로 통과하는 도로가 시의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는 도시이다. 대도시인 창원, 울산, 대구를 연결하여 명실상부한 영남의 교통중심지. 그래서 일찍이 근대화 초기부터 인근지방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화악산, 가지산의 지맥이 북동쪽에 융기해 있어 산세가 험준한 산간지대를 이루었지만 남쪽은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에 광활한 상남·하남 평야가 전개되어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농업생산력도 다른 시에 비해 과시할 만한 곳이다. 연수가 풍부하여 일찍이 섬유공업이 발달되었으며, 남천강변에 휴양지가 많이 있어 입지적으로 보아 상공업의 발달에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기후적 특색으로는 밀양은 작물재배는 물론 생활에도 매우 적합한 천혜의 기후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밀양시는 울창한 숲, 맑고 깨끗한 계곡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기후 또한 사계가 뚜렷하여 독특한 맛과 향기를 가진 농특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고장, 지난 23일 밀양시와 우호교류도시 업무협약체결을 위해 이른 새벽 출발하여 도착하였을 때, 우리 완도군과 유사하게 공기가 너무 좋아 도시라는 느낌보다 내 고장에 있는 것처럼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해맑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밀양시와 리아스식 해안으로 갯벌과 해조류가 숲을 이루고 있는 완도군!
지난해 신우철 완도군수님은 송기인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인 신부님의 초청으로 밀양을 방문하였고, 이 자리에 함께한 박일호 밀양시장님과 면담 중 두 도시가 지역 특성을 살려, 자매결연을 체결할려고 했다.

 

 

그런데 밀양시는 국내․국외 지방자치단체와 자매결연 협약을 체결․변경하거나 취소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해서 우선적으로 우호협력도시 업무협약 추진 중 코로나 상황 악화로 먼저 문서상으로 상호교류 의사를 확인만했다.

 

지난 7월 27일 밀양시에서 완도군에 우호협력도시 결연 의향서를 송부하였고, 8월 5일 우리군에서 밀양시로 우호협력도시 결연 의견을 회신 하여, 지난 11월 2일 우호협력도시 결연을 위한 밀양시 실무진이 우리군을 방문하여 양 자치단체 소개와 협력 가능분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지난 23일 밀양시청 소회의실에서 우호교류도시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상호신뢰와 우의를 바탕으로 상생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해 상호 협력하기로 약속하였다.


돌아오는 길, 머랄까?


어느 늦은 가을, 햇볕 좋은 날에 난초의 화분을 햇볕을 따라 옮겨주고 조심스레 난잎을 닦아주자, 가녀리게 흔들리는 난잎에 웬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 보글보글 찻물이 끓어 오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난향이 코끝으로 스미며 가슴이 참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 


그리고 또 하나, 송기인 신부님이 어떤 연유에서 두 도시를 맺어줬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리 군수님과 시장님의 성정이 어쩌면 그리 똑 떨어지게 닮았을까? 

 

 

임주리 완도군청 교류협력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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