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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 설진, 완도미역 보호에‘일익’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시즌 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1.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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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은 우리에게 귀중한 식량자원이 되었다. 그야말로 다용도로 쓰이는 미역이야말로 그야말로 우리 민족에게는 효자였던 것이다. 이에 조선왕조에서는 특히나 미역을 얻는데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조선 중종 재위(1506-1544) 시에는 완도를 재평가하기에 이르렇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흉년과 질병을 넘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을 것이 필요했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미역과 다시마는 물론 먹지 못한다는 황각까지 필요한 중차대한 시기였다. 따라서 그러한 먹거리를 확보할 전진기지로서 완도 청해진의 자리에 가리포진을 설진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가리포진은 중종 16년(1521년)에 설진되었다. 명목상은 왜구를 방어할 전진기지로서 기존의 달량진을 흡수 통합하여 가리포진을 만들고 첨사가 관리하는 상향조정안을 발의하여 가리포진이 설진되었다. 이러한 바탕에는 군사방어적인 이유뿐만이 아니고 구황작물의 생산과 채취, 그리고 식량자원 확보방안이 포함된 경제적인 목적도 분명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1513년 4월 8일의 김세호의 상소문을 보면 더욱 그러한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완도와 보길도 등지의 섬을 근거로 밤을 타서 출입하면서 도서민들을 괴롭히는 왜적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연해 백성들은 편안할 것이요, 해산물(海産物)은 미처 다 쓰지 못할 것입니다(海産不可勝用).


즉 가리포진을 설진하여 왜적들을 막는다면 완도의 섬들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는 해산물을 수확하면 미처 다 쓰지도 못할 것(海産不可勝用)라며 가리포진의 설진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야말로 무진장한 해산물이 완도 바다에 있다는 말이다. 겨울에서 봄에 걸쳐서 주로 채취되며 이 시기에 채취된 것이 가장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다고 한다. 특히 미역은 분류상으로는 식물이 아니라 원생생물에 속한다. 무기질, 비타민 및 섬유질 성분, 점질성 다당류, 아이오딘을 함유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우리는 식용해왔다.


따라서 완도 가리포진의 설진에는 이러한 전선이나 세곡선 등을 만들어야 하는 군사적인 필요와 백성들의 의식주 생활충족을 위한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리포진에 대한 기록으로 중종 17년, 가리포진이 설진된 1년 후인 1522년 6월 20일 “바닷물 속에 들어가 미역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들(鮑作干)이 보길도에서 왜적을 만나 의복, 식량, 잡물을 빼앗기고 배도 소실당했다”는 기록을 보면 가리포진 연해에서 구황작물인 각종 해산물의 채취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를 말해주고 있고 이것이 또한 가리포진을 설진한 이유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덧붙여 중종실록 1513년 1월 14일 “미역과 다시마 등 해조류를 군인들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서 채취하게 한 유래가 이미 오래인데(令軍人入海採取 其來已久)”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각종 해조류를 채취하는데 일반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들까지 동원하여 채취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중종 때의 흉년이나 가뭄, 수해와 질병, 역병 등으로 인한 구황 상황에 심각하게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는 것이 중차대한 국정과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완도의 미역은 지금까지도 국내전체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미역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음식 식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가리포진을 설진함으로써 조선 중종 대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다. 가리포진이 설진된 이후 1538년 1월 25일 중종은 “남쪽 바닷가 지역의 군민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려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을 드나들다가 왜적을 만나 살해당하기도 하며, 풍랑을 만나 패몰하는 자가 많이 있지만 첨사와 만호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며 숨기고 알리지 않는데 이러한 폐단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요사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특별히 조처하여 의정부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가리포진의 설진으로 많은 백성들이 기근과 질병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특히나 왜적을 방어하고 해산물을 얻고자 다목적용의 가리포진 설진은 중종의 업적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 미역을 둘러싼 분쟁과 고통은 황장목이나 황칠나무, 가시나무 등과 마찬가지로 민중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조선시대 성리학이 기승을 부리면서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보상으로 곽전(藿田)을 선사하여 도서민(島嶼民)에게는 가혹한 준조세로 작동하면서 미역은 또한 원망의 대상으로 번진 것도 우리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곽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47년 세종실록으로 “고려 때에는 염분(鹽盆)의 자리 수[坐數]와 어량(魚梁)·망소(網所)·곽전(藿田)의 결복(結卜)이 모두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실려 있고, 왕자(王子)가 개복(開福)한 날에는 반드시 염분(鹽盆)이나 어량(魚梁)을 주었고, 공의사사(共議寺社)에도 혹 곽전(藿田)을 주기도 하였는데, 그 밖의 관리(管理)하고 주간하며, 구별 처리하는 방법은 자세하지 않사옵니다.”라고 하여 고려시대 때부터 미역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영조실록 1754년 “고성(固城) 한 고을로 말하더라도 균역청의 세는 90냥에 지나지 않는데, 수령이 미역을 사서 생기는 이익은 많아서 2백 냥이나 됩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미역은 중요한 세금의 원천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또한 가혹하리만치 징수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나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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